에세이
지난 주말엔 애정 하는 친구 R의 결혼식이 있었다. 봄날의 늦은 오후, 그것도 야외 결혼식이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산 중에 있는 식장이니 얼마나 푸릇푸릇 아름다울까, 기대되었었다. 그런데 요 며칠 통 미세먼지에 황사까지 겹쳐서 너무 심했다. 가뜩이나 뿌연데 흐린 날도 많았다. 비가 오는데 미세 먼지 수준은 최악인 그런 쉽지 않은 4월이었다.
그런데 친구의 결혼식 날, 거짓말같이 미세먼지 앱에서 '좋음'이라는 단어가 떴다. 아침에 부슬비가 내리더니 이내 그치고 대기가 깨끗해진 것이다. 그뿐인가, 파란 하늘을 본 게 얼마 만이었는지 모른다. 사회를 준비하려 일찌감치 식장으로 향하는데, 다가갈수록 햇살이 내리쬐었다. 창문을 열고 마음껏 폐 깊은 곳까지 깨끗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봄의 야외 결혼식이라 미리 장만한 밝은색 정장을 입고 차에서 딱 내렸는데, 산의 공기가 정말 쾌적했다. 어쩜 이렇게 날씨가 갑자기 좋아지지? 모처럼 빛나는 햇살에 함께 간 친구와 함께 사진을 몇 장 찍는데 자연광이 예술이었다. 그 어떤 푸르죽죽한 낯빛도 환하게 만들 화사함이었다. 이내 친구와 남편 될 분의 정의롭고 다감한 성정이 떠올랐다. 열심히 바르게 사는 커플이라 이런 행운이 왔나 보다.
이미 준비를 마친 식장에 미리 들어가 보았다. 식장 구석구석엔 R의 흔적이 있었다. 은은하고 푸른빛 꽃 장식, 아기자기한 간식 케이터링, 앤티크 한 포토 박스... 소품 하나하나 R의 감성을 느낄 수 있어 편안했다. 식장 곳곳을 둘러보는 하객들 모두가 행복했다. 마치 하와이 같은 데에 온 느낌이었는데, 다들 비슷한 기분이었을 테다.
멘트를 정리하고 있으니 또 다른 친구가 도착했다. 축가를 부를 친구 P였다.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던 대학 시절, 그의 노래가 너무 좋아 노래 녹음 파일을 종종 들을 정도로 노래를 잘 부르는 친구였다. 잘 부르는 건 둘째 치고, P의 노래를 들으면 행복해지고, 슬퍼지고, 뭉클해진다. 진심이 예쁜 친구라 그렇지 않을까? R이 가장 좋아하는 밴드 자우림의 노래를 고른 P의 축가가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패션 센스가 남다른 P는 역시 야외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연둣빛 시폰 원피스를 입고 왔다. "관악의 백예린이네!" 농담을 던지고 함께 웃었다.
R이 있는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이라 표현하기 어색한데, 마찬가지로 야외에 작은 연못 곁에 있는 의자에 신부의 공간이 마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르르 R에게로 가서, 피로와 추위와 긴장과 함께하고 있는 R을 웃겨 주었다. 셋이 앉아 사진을 찍고 있자니 셋이서 함께한 추억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같은 학교, 같은 단과대, 같은 전공 출신이다. 같은 과여서 친해진 건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사회학을 전공했는데, 사회학과 전공생들 특징인진 모르겠지만 과 생활을 잘 하지 않는 아웃사이더들이 많은 편이다. 어쩌면 대학 생활 내내 인사 한번 안 했을 수도 있는 가혹한(?) 상황에서, 다행히 P와 R이 공통 관심사로 가까워졌고, 나와 같은 동아리 활동을 한 P가 나와 R을 연결시켜주었다. 서로 좋아할 것 같다며 내가 아르바이트하던 카페에 어느 날 R을 데리고 왔다. P의 예감은 적중하여 우리 셋은 종종 함께 다정한 시간을 보냈다.
누구는 취업을 하고 누구는 타지로 가고 또 누구는 학업을 이어가는, 부산스러운 상황에서도 퐁당퐁당 우리만의 시간을 가졌다. 내가 취업을 하며 부산으로 내려온 이후로 P와 R은 내 생일이 있는 겨울이면 바쁜 일정을 쪼개 꼭 부산까지 내려와주었다. 함께 광안리에 가서 바다를 보고, 내 자취방에서 밤새도록 음악을 듣고 유튜브 영상을 보고 와인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의롭고 다정한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큰 힘이 되었다. 나 스스로가 마음에 안 들고 나의 변화가 못 미더울 때에도 친구들을 만나면 다 괜찮아졌다.
작년 R은 아주 바쁜 한 해를 보냈다. 그래서 작년 초 오랜만에 셋이서 모였을 때, 앞으로 한 해 동안 못 만날 것 같다고 미안하다며 나와 P에게 양말을 건넸다. 각자가 좋아하는 색깔과 감성에 부합하는 너무나 예쁜 양말이었는데, 웬 선물이냐고 하니, 올해 생일은 못 챙겨줄 거 같아서 미리 준비해왔다는 것이다. R은 그런 사람이다. 타고난 공명심이 대단하고 내 주변에서 가장 명철한 사람이라 내가 흔들릴 때에 그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크게 기댈 때도 많았는데, 마음은 또 말랑한 양 같은 구석이 있다. 키가 크고 하얘서 북극곰 같기도 한데, 또 무해하고 순한 북극곰이랄까? 양과 북극곰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바쁜 일정을 마무리하고 또 급히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결혼식에서 어여쁜 드레스를 입은 R이 즐거워 보여 좋았다. 신랑 신부 입장할 때 R답게 아래를 바라보며 쑥스럽게 웃으며 들어오더니, 앞까지 와서는 사회 보는 나를 여러 번 쳐다봐 주는 R의 눈길이 좋았다. "히다아..."하며 내 별명을 부르는 R의 목소리가 순간 또 들리는 듯하다. R이 나에게 의지하고, 그 의지가 나를 반듯이 서게 하고, 나는 또 R의 단단함에 의지하고.
결혼식은 아주 순탄했다. 나무 위 하늘이 노을빛으로 은은하게 물들어갔다. 해가 져가면서 구름이 다소 끼긴 했는데, 오히려 노을빛이 뭉게뭉게 번지는 듯했다. P의 축가 시간이 되었다. 정말이지 '매직 아워'였다. 해가 지고 남은 빛이 아름답게 퍼지는 순간. 신랑 신부는 행복하고, 하객들은 즐겁고, 새는 노래하고, 공기는 청명했다. P의 축가가 울려 퍼질 때는 정말이지 숲속 콘서트 같았다. 후에 들으니 밝은 노래인데도 P가 노래할 때 많이들 울컥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 무대에 세 사람이 다 있었다. 아름답고 멋진 신부 R, 노래하는 P, 곁에서 진행하는 나. 두 사람이 서로 눈 마주치는 걸 보며 울컥했다. 아, 또 곱씹을 아름다운 순간이 생겼구나. 물론 결혼의 주인공은 신부와 신랑이지만, 각자 몫의 힘듦을 성실히도 견디며, 그 와중에 서로를 아끼고 소중히 대해온 우리 세 사람에게 아주 특별한 사진 한 장이 추가되겠구나, 다들 직감했을 것이다.
식사까지 야무지게 잘 마치고, 우리는 각자의 공간으로 흩어졌다. 행복의 여운이 오래가서 마음 한 편이 조금 아련했다. 지금쯤 R은 신혼여행지에서 비로소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고, P는 늘 그렇듯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이며 하루를 잘 마무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지난 주말을 곱씹으며 글을 쓴다. 할머니가 돼서 "그때 R 결혼식 때 그랬잖아." 하면서 재미난 이야기를 늘어놓을 게 벌써 눈에 선해 재미있다. 그때도 변함없이 우리는 서로의 칭찬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딘가 어려진 목소리로 서로를 귀여워하면서.
23.04.1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