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니까 써야 합니다 1
사회는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 집단, 자원, 자본, 법률 등 명확히 눈에 보이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정서, 또는 감정이라고 일컫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 요소에 속한다. 그렇다면 최근 우리 사회를 이루는 가장 큰 감정은 무엇일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불안’이라고 답하고 싶다.
불안은 불확실성에서 출발한다. 미래에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 없기에 불안한 것이고 사람들은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방법을 총동원한다. 자랑할 만한 학벌, 높은 연봉, 모두가 알아주는 유명한 직장을 통해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 불안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 불안해지고 앞이 캄캄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 안의 중심이 타인에게 있어서다.
우리는 나로서 살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자신을 인식할 때 마음의 중심에 내가 아닌 타인을 먼저 둔다. 내가 얻을 수 있는 도전 의식과 행복, 성취감보다는 부모님과 친구들의 시선을 먼저 의식하고 행동한다. 그들이 쏟아낼 걱정이나 훈수, 비난과 조롱에 겁이 나서 정작 원하는 것을 뒤로 미루고 그럴듯한 학벌, 연봉, 직장을 꿈꾼다. 심지어 이게 내가 정말 원하는 거라고 자기암시까지 건다. 부모님이 인정하고 흡족해하는 자식으로, 친구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나로 사는 게 가장 행복한 길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이 확 지치는 날이 찾아오면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든다. 나 지금 행복한 거 맞나?
다양성이 부재하고 나의 기준점이 외부에 있는 개인이 늘어난 사회는 당연히 불안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모두가 주관적인 개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남들 눈에 비치는 나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종종 말도 안 되는 사회적 시류가 생기기도 한다. 한때 공무원 시험 열풍이 일었던 것도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다. 철밥통이라는 안정감, 또는 주변의 인정을 얻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택한 청년이 많았지만, 그 속에서 나와 맞지 않는 시스템을 경험하고 퇴사하는 사례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자의로 택한 길도 평탄하지 않은데 타의로 택한 길은 오죽할까.
정말 안타까운 건 이런 사회적 시류가 비슷하게 수년간 반복되고 누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조건 어디 가서 꿀리지 않을 학벌, 연봉이 높은 직업, 남이 나를 우러러볼 수 있는 직장 등 가족과 친지들에게 자랑이 될 법한 일에만 목표를 두다가 나를 잃어버린 사람이 많아졌다. 이젠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도 모르겠고, 다가올 미래가 엉망일까 봐 두렵고, 하루하루 버틴다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사회 전체에 불안이 영향을 미치는 영역이 커졌다. 임계치가 넘어버린 개인의 불안은 일상을 병들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사회가 더 좋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희망마저 앗아간다. 나는 우리 사회가 불안을 어떤 방향으로 써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분기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안타깝지만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다. 불확실한 미래가 있는 한 인간은 언제까지나 불안을 그림자처럼 끌고 다녀야 한다. 게다가 우리나라 분위기상 가족이나 친구, 주변 사람을 떼어놓고 내 생각만 하며 살기란 훨씬 더 어렵다. 개인보다는 집단을 우선시하는 이 사회에서 눈치 보지 않고 불안을 덜 느끼며 산다는 건 어쩌면 꿈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커다란 불안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금껏 남 눈치 보며 살았으니 내일 곧장 잘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하라거나 잘하던 공부를 엎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타인에게 넘긴 나의 중심을 되찾아오라는 뜻이다.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다양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불안은 특이하게도 날개를 달고 있는 감정이다. 제멋대로 미래로 날아가서 있지도 않은 장면을 상상하고 돌아와서는 나를 정신적으로 괴롭힌다. 제발 불안해하기 싫으니 가만히 있어 달라고 부탁하면 부탁할수록 사람을 더 놀리듯이 도망치고 더 몸집을 불린다. 불안이 날뛰게 내버려 둘수록 나에게 이롭지 못한 선택을 할 확률이 높아진다. 당장 이 불안을 억누르고 싶어서 주변 사람들의 조언이나 훈수에 쉽게 휩쓸리게 되고, 그 사람들이 보는 내가 가장 객관적일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타인이 나를 더 잘 안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아주 일부분은 알 수 있을지 몰라도 속속들이 알 순 없다. 하루종일 내 걱정만 하는 나와 아주 잠깐 나를 보고 훈수 두는 사람 중 누가 더 나를 잘 알까. 나를 더 잘 아는 건 나밖에 없다. 그러니 나의 중심을 타인에게 양도해선 안 된다.
나의 중심을 타인에게 양도하지 않는 방법은 불안함을 느끼게 하는 모든 것을 글로 써보는 것이다. 현재 기분이나 상황, 생각 등을 글로 써서 박제하면 신기하게도 불안은 더 이상 날뛰지 않는다. 먼 미래로 날아가려던 날개를 고이 접고 내려앉는다.
이렇게 글 쓰는 나 역시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진 못하다. 나의 꿈이 가족에게 짐이 될까 봐 두렵고, 꿈을 이루지 못하면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판단될까 봐 무섭다. 나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의 쓸모를 가족의 행복과 사회의 발전에서만 찾으려 한 것이다. 물론, 가족의 행복도 사회의 발전도 멋진 목표다. 하지만 그 과정 안에서 내가 불안하고 불행하기만 하다면 그건 궁극적으로 옳은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족의 행복, 사회의 발전이란 목표 안엔 단순 성취뿐 아니라 나의 행복 또한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매일 글을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른 이들을 생각하는 마음 못지않게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 또한 중요하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 서툴지만, 부족하지만 그래도 글쓰기를 통해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믿는다.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들로만 가득하면 참 좋겠다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이토록 불안해하며 살진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철없는 상상을 할 때가 있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사람은 언젠가 나를 떠나거나 배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남긴 글만큼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끝까지 곁에 남아서 나를 지켜주고 위로해준다. 그 사실을 조금 더 많은 이들이 알게 된다면 이 불안한 사회가 조금이나마 더 건강해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처럼 불안한 사람들이 걸어갈 길들이 조금은 덜 버겁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