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물갈이야

급하지 않아. 천천히.

by 영희

아침이다. 푹 잤다.

푹 잔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못 자본 사람은 안다. 결핍은 나를 자꾸만 작게 만들지만, 이곳에서 깨닫는다. 결핍이 주는 감사를. 무엇 때문인지 잠이 잘 오지 않는 날을 보낸 지 몇 달이다. 세시, 네시, 어떤 날은 다섯 시가 되어야 자는 그런 날 말이다. 그런데 어제는 푹 잤다.


바쁘다.

빵을 굽고,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어 아침을 먹는다. 오늘은 큰아들이 어학원을 처음으로 가는 날이다. 서둘러 학원으로 갔다. 레벨테스트를 하는 걸 보고 둘째와 나는 밖을 나와 동네 한 바퀴를 했다. 마트 가는 쉬운 길도 찾고 모기약 사러 약국도 갔다. 아침부터 속이 불편하다는 둘째는 화장실을 갔는데 좌변기가 아닌 변기와 바닥에 가득한 물을 보고선 기겁을 하고 숙소로 갔다.


점심시간, 첫째를 만나 셋이서 같이 밥을 먹는다. 어학원 근처 푸드코트에 가서 밥을 산 후 식탁에 앉아 먹는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밥을 먹고 있다. 선한 눈의 말레이계 사람들, 아랍 쪽에서 온 듯해 보이는 사람들, 수염이 멋진 인도계인듯한 사람, 서양사람, 두리번거리고 있는 한국사람인 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만큼 먹는 음식도 다양하다. 우리 앞 테이블에 앉은 분은 손으로 밥을 먹는데, 손에 하나도 안 묻히고 우아하게 밥을 먹는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 모습이 묘하게 멋있어서 흘끔 보았다. 나는 참으로 우물 안 개구리이구나. 싶다. 밥을 먹고 퇴식구가 어디인가 찾고 있으니, 그냥 그 자리에 두면 된다고 한다. 아, 치우는 걸 담당하는 분이 계시는구나.


숙소로 오니 둘째가 토를 한다. 설사를 계속하고, 설사를 하면서 토를 한다. 약을 먹여도 별 차도가 없다. 아파하는 둘째를 보면서 이게 말로만 듣던 물갈이인가 생각했다. 그저 그런 설사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 첫째가 온다. 둘째는 화장실을 드나들다 지쳐서 잠들고, 나는 물과 저녁밥 재료를 사야 하기에 둘째가 잠든 사이에 첫째와 근처 마트를 다녀온다.

첫째는 수줍음이 많다. 그런데 하루 아니 반나절 사이에 변했다. 같은 반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사람과 일본, 예멘 사람들이 너무 신기하고 친절해 보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도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걸 보고 자신감이 생겼다나? 마트에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익스큐즈미, 웨얼 이즈 에그? 이러고 있다. 왜 이리 귀여운지...... 아, 누워있는 둘째를 생각하니 여유를 부릴 수가 없구나. 필요한 것만 얼른 사서 숙소로 간다.


냄비에 죽을 끓인다. 첫째를 위해서 감자볶음과 계란프라이를 해서 어제 산 김치와 먹는다. 말레이시아는 감자도 맛있다. 재료들이 맛있고 신선하다. 오늘도 계란의 맛에 감탄한다. 둘째는 흰 죽을 두 수저 정도 먹고는 안 먹는다고 한다. 차라리 안 먹는 게 낫겠다 싶어 두었다. 그마저도 토한다. 그래도 컨디션이 낮보다는 나아 보인다.


괜찮아. 물갈이야. 외국을 오면 이런 경우들이 종종 있어. 자고 나면 나아질 거야.라고 이야기한다.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설거지를 해 놓고 빨래를 돌리고 잠깐 옥상에 가서 야경을 본다. 와. 눈부시다. 이 모든 하루가.

무언가를 경험하고 보아야 한다는 마음도 내려놓는다. 급하지 않아. 천천히. 또 천천히……라고 다짐해 본다.

숙소로 와서 아이들에게 동남아시아 지도를 그려주며 설명을 해주니, 첫째는 영어로 대답한다. 물론 콩글리시로…… 오버하는 이 모습도 귀엽다.


우리는 점점 적응하고 있다.

엄마는 오늘 통화할 때 너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는 울지 않고 웃었다


나도 사랑한다. 지금을.

이 모든 감정과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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