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이 가득한 밤

패키지 투어를 해보자.

by 영희

토요일이다.

늦잠을 자도 되지만,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한다. 빵과 계란, 한국에서 가져온 인스턴트 수프로 아침을 먹고 오전 내내 쉰다. 아이들은 수학 한 장을 풀고 오전 내내 핸드폰을 들고 유튜브를 보았고, 나는 내 분을 참지 못하고 아이들을 다그쳤다.

점심으로 한국라면을 먹고 옷을 챙겨 입고 나선다. 주말에 주요 관광지를 돌아다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투어를 신청했다. 집을 나서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45인승 버스를 타고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 세상 편하다. 차에 태워져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지만, 구글 지도를 펴지 않고 앉아서 귀로 설명을 들으니 편하기 그지없다. 사람마음이란 후후.

왕궁을 갔다. 왕궁은 으리으리했고, 왕이 안에 있다는 노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후딱 차로 온다. 그래, 이게 패키지지.

왼쪽에 노랑 깃발이 있다는 건 왕이 안에 있다는 이야기

다음으로 종유석 동굴이자 힌두교 사원인 바투 동굴로 간다. 사람이 엄청 많다. 사람보다 비둘기와 원숭이가 많다. 닭도 있네. 여기는 말레이시아인가 인도인가, 아이들 손을 꼭 붙들고 272개의 계단을 오르니 어마어마한 동굴이 나온다. 우와. 자연은 대단하구나. 처음 이 동굴을 발견한 사람은 얼마나 경이로웠을까. 자연은 늘 감동을 준다. 잠시 동굴이 있는 이 산을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가기 전에는 악명 높은 원숭이 때문에 걱정했는데, 원숭이는 생각보다 얌전했고 원숭이보다도 우리 앞에서 소리 지르면서 올라가는 사람에게 기가 빨렸었다.

계단끝 하늘이 열린 동굴이 있다.


다시 45인승 버스에 몸을 넣고 쿠알라 셀랑고르로 이동, 도로 양쪽은 야자숲이 이어진다. 과연 이곳은 세계적인 팜유 생산국이다. 야자나무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세계도 있었구나. 우와 세상은 정말 넓구나. 나는 참으로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다닐수록 깨닫는다.

도로 정체로 두 시간을 달려 원숭이 간식주기 체험을 한다. 동물을 좋아하는 둘째는 간식을 두 봉지나 주머니에 넣고 착해 보이는 원숭이를 찾아서 먹이를 하나씩 주었고, 동물만 보면 피하는 나와 첫째는 둘째의 모습을 지켜보며, 원숭이에게는 두 손을 펴고 네가 먹을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한다.

아기를 안고 있는 원숭이에게

바투 동굴도 그렇고 이곳도 그렇고 사나운 원숭이들이 있다. 내가 원숭이라면 저런 원숭이와 같이 살면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사람 사는 세상은 더하지 싶어 웃음이 난다.

다시 차를 타고 밥을 먹으러 간다. 길 가에 있는 중국식 해산물 요릿집이었는데, 맛이 기똥차다. 아무리 시장이 반찬이라 해도 미슐랭급 미각을 가진 첫째도 극찬을 한다. 기분이 좋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지 않고서도 배불리 먹는 저녁이다.

아. 잘 먹었다.

배도 부르고 어두워지니 대망의 반딧불 투어를 하러 간다. 구명조끼를 하나씩 입고 나룻배를 탄다. 캄캄한 밤, 숲에서는 반딧불이 반짝거리고 하늘에서는 별이 반짝거린다 노 젓는 소리가 들리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완벽하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평안이 스며든다. 격정적이지 않고 조용한 밤, 내 마음도 빛이 난다. 사공은 반딧불이를 내 손에 놓아주고 나는 반짝이는 그것을 한참 보다가 아들에게 쥐어준다. 아들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반딧불이를 한참을 보다가 이내 밤 속으로 날린다. 엄마, 정말 낭만적이에요. 그래, 정말 그렇구나.

낭만적이다. 이 곳, 캄풍 쿠안탄의 밤.


낭만적인 반딧불투어를 마치고 차는 한 시간여 도로를 달려 이내 수도로 들어선다. 별빛 가득한 곳에서 불빛 가득한 곳으로 들어오니 불현듯 얼마 전의 내가 떠오른다. 서울을 벗어났다가 서울에 들어서면 가슴이 답답해지던 나. 어떤 날은 너무 서울에 들어가기가 싫어서 차에서 울기도 했었다. 이곳에도 과거의 내가 있어서 저 불빛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할까? 그 사람도 가슴을 짓누르는 무언가 때문에 지쳐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캄풍 쿠안탄으로 가세요. 그곳에서 나룻배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를 들으며 별을 보세요. 당신을 위로해 줄 거예요. 당신을 쓰다듬어 줄 거예요.


감사하게도 나는 지금 타국에서 온 이방인, 이곳을 느끼려 온 여행자이다. 감사가 물밀듯 몰려온다. 이런 귀한 시간과 장소를 흠뻑 느끼고 있음을.


쿠알라룸푸르 시내로 돌아와 야경을 보며 오늘 투어를 마친다. 맘 편히 즐겁게 낭만적인 여행을 했다.


자연의 모습도 삶의 모습도 참으로 다양하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맹그로브, 끝도 없이 펼쳐진 야자수, 맨발로 바투동굴을 오르던 사람들, 차창밖 불 켜진 주택에 살고 있을 사람들, 노를 젓는 사공, 그리고 타국에서 이 모든 걸 느끼고 있는 나.


이 마음을 너에게 보낸다.

피곤하고 외롭고 답답해하던 과거의 너에게.

그리고 돌아갈 곳에서 생각에 잠겨있을 미래의 너에게

이렇게 넓은 세상에서 각 사람들은 다양한 생각을 하고 다양한 삶을 살고 있으니, 지금 정답이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말기를, 너무 애쓰지 말기를. 너는 너의 답안지를 찬찬히 잘 쓸 것이고 평가는 너의 몫이 아님을. 그러니 부디, 부디 너는 평안하길.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