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싸복이 남매와 산책하다가 발바리를 처음 만났다. 발바리는 참 예뻤다.
동네 어귀, 커다란 삼층집에 삼대가 모여사는 집이 있다. 발바라는 그 집 강아지였다. 시골 개들은 대개 세부류다. 백구, 황구, 그리고 발바리. 시골에서는 백구, 황구처럼 크지 않고(몸집이 작고), 얼룩덜룩한(흰색 바탕에 짙은색의 얼룩이 있는) 강아지들을 발바리라고 부른다. '발바리'는 딱 그런 생김새였다. 작은 몸집, 흰 바탕에 갈색 무늬, 조금 긴 털.
'발바리'는 처음부터 경계가 없고, 낯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를 너무 좋아했다. 나만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 싸복이 남매를 엄청 좋아했다. 산책하다 만나는 개가 한 둘이 아니다. 시골 동네답게 묶여 있는 개들이 많다. 대개는 나를 경계하고, 싸복이 남매는(특히 행복이를) 더더욱 경계한다. 게다가 우리 행복이는 대개의 개들을 몹시 싫어한다. 내가 동네 개들과 친해질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 발바리는 예외였다. 처음부터 행복이를 보고 겁도 없이 좋다고 달려들었다. 처음엔 질색팔색 하던 행복이는, 볼 때마다 들이대니 나중에는 결국 발바리를 봐도 짖지 않았다.
항상 싸복이 남매를 달고 있어 발바리 사진을 찍을 여유가 없었어요. 제게 발바리 사진 한 장이 없네요. 오며 가며 만날 때마다 싸복이 남매 몰래 챙겨 온 간식을 주기도 했고, 추운 겨울엔 싸이 옷을 입혀주기도 했다. 싸복이 남매와 넷이서 한참 동안 노닥거리 기도 했고, 줄이 풀렸을 땐 산책길에 동행도 했다. 언제가 한 번은 저기 멀리서 나를 알아보고 열심히 뛰어오기도 했는데, 그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발바리와 정이 듬뿍 들었다.
발바리는 실제 이름이 '발바리'라고 했다. 성의 없게 이름을 지은 만큼 그 집 사람들은 발바리에게 다정하지 않았다. 발바리는 때론 다른 시골 개들처럼 줄에 묶여 있었고, 줄이 풀려 방치돼 있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집 손녀들이 발바리를 다소 예뻐한다는 사실이었다. 손녀들을 통해 발바리의 이름도 알 수가 있었다. 드물지만 한 번씩 산책시켜 주는 걸 보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정도가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친절이었을 것이다.
우리 동네에 묶여 있지 않은 강아지는 싸복이 남매뿐이다. 동네에서 나는 매일 강아지 데리고 산책하는 여자로 통한다(시골에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므로) 중성화 수술을 하지 않은 발바리는 당연히 임신을 했다. 동네에는 어슬렁 거리는 개들이 많기 때문이다. 세 마리 새끼를 낳았고, 한 마리만 살아남았다. 시간이 지났고 새끼는 점점 커갔다. 아뿔싸, 그런데 새끼가 수컷이다. 수컷임을 알았을 때 나의 심정이란. 저대로 두면, 발바리가 또 임신할 것이 뻔했다. 알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남의 집 일에 상관할 만큼 오지랖이 넓은 성격도 못 됐다.
새끼가 커가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발바리의 새끼는 우리를 엄청 싫어하고 짖어대, 발바리 얼굴을 보기 조차 쉽지 않았다. 예상대로 발바리는 임신을 했고, 또 새끼를 낳았다. 그중 한 마리는 조금 떨어진 이웃집으로 보냈다. 발바리와 똑 닮아 한 없이 예뻤던 그 강아지가 보내진 곳은, 짧은 목줄에 제대로 바람을 피할 집조차 없었다. 너무 안타까웠다.
발바리를 꼭 닮아 너무 예뻤던 발바리의 두 번째 새끼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저 시절 나는 계속해서 '발바리를 납치' 하는 상상을 했다. 몰래 훔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쓸데없는 상상이었다. 같은 동네에서 내가 키울 수도 없고, 어디 입양 보낼 곳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발바리의 모습은 또 임신한 모습이었다. 배가 부른 채로, 짧은 목줄에 묶여 있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그 이후에, 산책 경로를 아예 바꿔 발바리의 집 앞을 지나다니지 않았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나를 따르던 발바리를 외면했다. 시간이 오래 흐른 후에, 그 집 앞을 몇 차례 지나칠 일이 있었다. 발바리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발바리의 새끼만 그 집 차고에서 살고 있는 듯했다. 아마 무지개다리를 건넜으리라. 발바리의 두 번째 새끼도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는다.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개장수에게 팔려갔거나 병에 걸려 죽었거나.
발바리가 강아지 별에서는 목 줄 없이 자유롭게 뛰어놀고 있을 거라 믿는다. 발바리를 볼 때마다 참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작고 예쁜 아이가, 차가운 겨울바람을 견디기엔 나약해 보이는 몸으로 밖에서 생활을 하다니. 지금까지도 발바리 생각만 하면 슬픔이 온몸을 감싼다. 작은 몸으로 세 번이나 출산을 되풀이하다가 결국은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발바리가 강아지 별에서는 평안하게 잘 지내고 있으려나.
동물들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을 똑같이 느낀다. 사회성이 강하고, 활동적인 강아지들이 짧은 목줄에 묶여 있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이다.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방식이 때때로 폭력적이라는 것이 참 슬프다.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사람이라면 동물이 타고난 본성에 가깝게 살 수 있게 배려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강자가 약자에게 좀 더 너그러운 세상이 되기를 꿈꿉니다. 나에겐 꿈이 하나 있다. 정년을 하고, 지금보다 여유시간이 훨씬 많아지면, 동네 개들을 돌보고 싶은 꿈. 간식도 주고, 약도 챙겨주고, 주인을 설득해 목줄을 좀 더 길게 해 주고, 산책도 시켜주고,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무언가를 해 주고 싶다. 세상 모든 불쌍한 동물들을 다 구원할 순 없다 해도, 적어도 내가 매일 보는, 우리 동네 개들에게만큼은 좀 더 편한 삶을 선물해 주고 싶다. 나는 그렇게 미래를 기약하며, 오늘도 어딘가에서 고통받고 있을 제2, 제3의 발바리를 모른 척 외면한다.
나는 세상 모든 연약한 존재에 대한 배려가 기본이 되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언젠가 내가 꿈꾸는 세상이 오기는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