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글쓰기
삶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고 모험이라고 흔히들 표현한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탐구하고 탐색하면서 한 껍질씩 벗겨 나가며 속 알맹이를 찾길 원한다.
저명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소크라테스조차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남긴 걸 보면 그도 자신을 알길 원했던 모양이다.
소크라테스는 과연 자신을 다 알았을까? 다 알았는지 그렇지 못했는진 모르지만, 아마도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다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오만이고, 착각이 아닐까?
나라는 인간도 이렇게 알기 어려운데 어떻게 타인을 알 수 있을까?
나라는 인간만 잘 알면 타인도 그것만큼 잘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이석원 작가님의 2인조라는 책을 읽으면 우린 혼자 있지만, 결코 혼자였던 적이 없다고 한다.
우린 나라는 사람과 늘 함께 있음으로 늘 2인조이다.
이렇듯 나를 아는 건 타인을 알아가는 것만큼 중요하다.
이러한 나를 알아가는 탐구적 활동은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린 그런 환경에 놓일 수 없는 곳에서 나고 자라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두고 있다.
우리는 이미 공산주의가 실패한 사상이라는 것을 경험과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따르고 있다.
이런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한 나라에서는 반드시 '경쟁'은 빠질 수 없는 수단이다.
내가 '노력'만 하면 부를 이룰 수 있는 시대이다.
그래서 시중엔 각종 투자 관련 책이 넘치는 이유이고, 너도나도 주식이며, 부동산이며 달려든다.
나의 노력만 있으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반대로 부자가 되지 못한 건 모두 나의 노력이 부재했기 때문이라는 반증이다. 이는 개인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고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말한다.
지금까지 내가 브런치에 쓴 글 중에서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한 글은 무엇일까?
https://brunch.co.kr/@heejay88/70
해당 글은 무려 조회수가 13만을 기록했다.
왜 이렇게 많은 조회 수를 얻게 됐는지는 아마도 브런치 담당자님이 내 글을 다음 메인에 올렸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 그리고 왜 사람들은 이 제목에 혹하여 클릭을 하게 됐는지를 본다면 우리 사회가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이 무엇에 혹하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회수 1등 글도, 2등 글도 제목에 1등이 들어간다. 1등, 그렇다 누구든 이것을 쥐기 위해 노력한다. 학창 시절 1등이 아니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던 때, 나의 존재를 등급으로 나누던 때 우리는 나를 탐구하고 나를 찾는 과정을 등급과 숫자와 점수로 환산했다. 그것이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수단이었고, 말미암게 하는 가장 큰 역할이었던 것이다.
위 글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댓글은 이렇다.
물론, 의사가 됐기 때문에 먹고 살 걱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부가 등수가 점수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때의 자신을 돌아보면 사실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는 점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삶은 정말 무수히 많고 다양한 길이 있다는 것을 배워야만 했지만 우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주말에 만난 친구는 전교 1등을 하던 친구였다. 그리고 그녀는 원하는 직업을 갖기 위해 각고의 노력 끝에 얻게 되었다. 그 직업은 남들이 부러워 할만한 직업이며, 되기 위해선 시험을 쳐야만 하는 그런 직업이다.
하지만 그녀의 최근 고민은 삶이 너무 '공허하다'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대학을 나왔고, 남들이 부러워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직장을 얻었으며 지금까지 남부러울 것 없이 잘 지내오고 있지만 왠지 공허한 삶은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나의 삶은 오직 내가 이끌고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이 있는 그녀지만, 남편으로 맞이할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삶이 바뀐다는 말을 들을 때면 뭔가 이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단다. 내 삶이 타인에 의해 바뀐다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일까? 나도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는데 말이다.
물론, 남들이 볼 땐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에겐 고민이 아닐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뒤로 퇴보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발전 없는 일을 한다는 그녀의 말에 현재나 1년 뒤나 2년 뒤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삶이 안정적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무기력한 하루가 어쩌면 답답하고 공허함을 주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대학만 가면 잘 될 거야' 혹은 '취업만 하면 잘 풀릴 거야' 같은 말들 흔히 들어봤을 것이다. 이를 두고 우린 문턱 문화라고 한다.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는 삶은 어쩌면 굉장히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형화된 삶의 루틴이랄까? 그렇게 문턱을 하나씩 넘어온 우리들은 또 다른 문턱 앞에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이 문턱을 넘는 게 맞을까?
지금껏 그 문턱만 넘으면 내 삶이 더욱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왔지만 품은 희망만큼 나아지지 않는 삶을 볼 때면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삶은 한 가지의 길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많이 왔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돌이키기 힘들다면 우린 그 삶을 계속해서 나아가는 게 좋을까 아니면 조금 느리겠지만 다시 돌아가는 게 나을 것인가? 그것은 오로지 개인의 선택이다. 그렇기에 우린 나라는 사람에 대해 잘 알 필요가 있다. 모든 선택은 나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나를 발견하고, 다양한 도전과 경험을 통해 나라는 인간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야 말로 진짜 공부라고 생각한다.
난 지금까지 꽤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까지 겪은 것을 보면 참 인생이 다이내믹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첫 번째로 사이비 종교가 있고, 두 번째로는 해외에서 짧은 2번의 삶이 있고, 세 번째로는 남들이 잘 가지 않는 오지 장기 여행이 있으며, 네 번째로는 독립출판으로 작가가 된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또 무수한 경험들을 해 나갈 것임에 분명하다.
난 이러한 일련의 경험들을 겪으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고 생각한다.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상황들 앞에서 어떻게 대처를 하고 헤쳐나가는지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이러한 사람이구나 나는 이럴 때 이렇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들을 데이터로 쌓아왔다.
그러한 모든 결과물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에 우리는 꽤 다양한 것들을 통해 나를 마주해야 한다. 일상적인 루틴 한 삶에선 사실 나를 알기 힘들다. 매일 겪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선 나의 다른 모습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젊을 때 그리고 어릴 때 나를 세상 속으로 던질 수 있는 용기를 낸다면 보다 다양한 모습의 나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여행이든 출판이든 뭐든 관계없이 지금까지 해 보지 않았던 것들을 통해 나를 찾아보자. 경쟁도 좋고 취업도 좋고 결혼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랬을 때 취업도 경쟁도 결혼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수능을 실패했다고 해서, 원하는 대학을 못 갔다고 해서, 취업을 못 했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아니 좌절을 하더라도 삶이 끝난 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은 실패한 삶이 아니라 그저 실패라는 하나의 경험을 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내가 얻을 것은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 우린 다음을 살 수 있다. 그것이 나를 알아가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