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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를 배우는 베티나

내가 알려주는것보다 배운것이 훨씬 많을것 같은 인연

by 조희진

"내 친구 중에 한국사람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데 혹시 너 관심 있어?"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전문적으로 외국인에게 한글을 가리켜본 적은 없지만 흥미로웠다. 그렇게 지난 주말 베를린의 한 카페에서 베티나를 만났다. 만나기 전에는 메시지를 주고받고 전화통화로 간단하게 서로를 소개했고 약속을 잡았다. 베티나는 베를린에서 라틴 댄스 학원을 운영 중이며 동시에 댄스 선생님이라는 것 말고는 더 이상의 정보는 없었지만 댄스 선생님이라는 직업 자체가 벌써 궁금했다. 어떤 사람일까.


혹시 카페에 자리가 없을까 30분 일찍 가서 먼저 커피를 마시며 앉아있었다. 시간 맞춰 등장한 베티나는 나보다 열다섯 살 정도 많아 보였고 짧은 단발머리에 오렌지색 스웨터와 머플러가 잘 어울렸다. 독일의 캄캄한 겨울에는 사람들이 검정옷을 입어야 하는 규칙이 있는 것 마냥 모두가 무채색인데 그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채도 높은 옷차림이 어색하지 않았다. 차를 가지고 왔는데 주차 자리를 찾느라 10분이 넘게 주변을 돌았다며 결국엔 멀지만 다행히 주차할 수 있었다고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그녀였다.


지난 몇 년 사이 나는 새로 이직을 해서 동료들을 알게 된 것 말고 사적으로 온전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된 게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었지만 이 자체로 나는 조금 들떠있었다. 가장 많이 시간을 함께 보내는 남자친구를 제외하고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베를린의 친구들이 내가 한 달에 한두 번 만나는 가까운 사람들이다. 생일이나 연말을 같이 챙기고 축하하며 종종 만나는 친구들과의 관계가 깊어진 만큼 새로운 사람을 알고 만나는 기회가 적어진 듯했다. 누구보다 집돌이이고 누군가를 만나면 친해지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는 내 성격이 크게 한몫했겠지만 마흔이 넘어서 새로운 사람과 인연을 맺기란 노력 없이는 쉽지 않은 것이 분명하기에 이 기회가 감사했다.


베티나는 한국어를 공부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이제 막 한글을 읽고 쓰는 수준이었다. 지난 10월에는 딸과 한국에 방문해 1달을 서울에서 지냈다고 했다. 나는 살사 대회라던지 무슨 행사가 있어서 서울을 갔겠거니 했는데 내 생각과는 전혀 달리 온전히 한국이 궁금해서 다녀온 여행이라고 했다. 한국을 좋아하고 알고 싶은데 어느 정도 지내면서 그 문화를 겪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 오래 머물렀다고 했고 생각보다 사람들이 무뚝뚝하고 차가워서 놀랬다는 말도 덧붙였다. 특히 길에서 보이는 중년 남성들은 너무 표정이 없다는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와닿았다.


다행히 한국에 대한 좋지 않은 그녀의 첫인상은 열린 살사 파티에서 모두 풀렸다고 했다. 아니, 길에서나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너무 표정이 없고 빠르게 걷고 차가운데 서울에서 열린 라틴 댄스 행사에 갔더니 사람들이 모두 친절하고 지금까지 밖에서 본 한국인들과 다른 나라 사람 같았다고 했다. 역시, 살아봐야 하는 것일까. 한국인의 양면을 모두 파악하고 온 베티나였다. 그렇게 한국에 대한 얘기를 하고 지금까지 배웠던 한글책을 꺼내며 본격적으로 한국어 수업에 대해 얘기하는데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자 하는 열정은 가득하면서도 본인의 현실을 너무 잘 파악했다.


자기는 매일 댄스수업도 있고 학원도 운영하고 있어서 한국어를 너무 많이 하려고 하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될 것 같다고 빨리 잘 배우고 싶지만 매일매일 즐기며 할 수 있는 시간만큼 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녀의 부탁에 흔쾌히 맞출 수 있었다. 오히려 대략적인 수업의 틀을 생각하고 주중에는 전화로 주말에는 만나서 복습을 하는 등 내가 생각했던 수업계획은 훨씬 빡빡했고 베티나가 바라는 바와 달랐다. 한국인인 나는 취미로 배우는 언어일지라도 고등학교 수업처럼 생각이 되는 것이었다. 독일어가 모국어인 그녀는 이미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영어를 배워 유창하게 쓰고 있어서 그런지 한글이 비록 알파벳 언어는 아니지만 그래도 새로운 언어를 시도하는 게 익숙해 보였다.


스물여덟 살의 딸이 있고 그녀도 라틴댄스 강사라 연말에는 함께 브라질로 한 달 이상을 여행을 간다며 그 시간 동안은 한국어를 잠깐 쉬어야 한다고 말하는 그녀는 에너지가 흘렀고 여유로웠다. 매일매일 음악에 몸을 움직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문화와 언어를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베티나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누군가 카페에 앉은 우리 둘을 본다면 외적으로는 어린 나보다 그녀에게 더욱 젊은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몇 년 만에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이제 막 친해지는 단계이지만 내가 알려주는 한국어 이상으로 내가 그녀에게 몇 배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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