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메뉴만 통일되었을 뿐 모두 제각각
새해가 밝았습니다! 어제는 늦게까지 노느라 느지막이 일어나 새해는 또 하루의 반만 겪은 셈이 되었다. 한국은 여러 다짐과 함께 첫날 일찍 일어나 일출을 보러 가는 문화가 흔한데 독일에 살면서는 단 한 번도 새해 첫날 일출 보러 가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구름이 많아서 해가 안 보이는 날이 부지기수인 동네에서 해구경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고 해가 나와주어야 하는 것이다. 역시나 오늘도 해는 보이지 않았고 종일 저녁 같은 캄캄함으로 하루가 채워졌다.
아마 1년 중 문 여는 가게가 가장 없는 날이 1월 1일 아닐까.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은 식당이나 카페라도 여는데 1월 1일은 모두가 전날 불태우고 쉬는 걸 아는지 아무 가게도 열지 않는다. 아, 오늘 대낮에도 유명 클럽 베엌하인 Berghain에는 줄이 길게 서있더라고 하더라. 낮도 밤 같고 밤도 낮 같은 날들은 아직 2025년인지 아니면 이미 해가 바뀌었는지 망각하기 알맞다. 불빛 없는 회색의 길에는 사람도 없고 차도 없다. 베를린은 바람도 유독 많이 불었는데 새해의 밝고 희망찬 기운은 돈과 시간을 들여 따뜻한 섬나라로 여행을 가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어제 늦게까지 놀았다 하지만 거하게 파티를 하거나 술을 많이 마신 것은 아니다. 조촐하게 친구들 몇몇과 발터의 집에서 저녁을 먹었고 독일사람들이 모이면 하는 그것, 보드게임을 했다. 두 가지 게임을 종류별로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넘어가있었고 먹고 마시기만 하고 크게 움직이지 않은 덕인지 나름 늦게까지 버틸 수 있었다. 40대 후반과 50대 초반의 우리들은 대부분이 10시 되면 자러 가야 하는 사람들이라 어제 나름 선방한 거다. 폭죽이 시끄럽고 무서워 베를린에 있고 싶지 않았지만 창문 꽁꽁 닫고 보드게임 열심히 하다 보니 폭죽도 어느새 잠잠해졌더라. 전쟁이 난 것 같은 베를린의 실베스타밤에 조곤조곤 게임하는 어른들이었다.
나와 발터가 호스트가 되어 가까이 사는 친구 조지, 그가 최근 만나기 시작했다는 마리아, 그리고 스위스에 사는 헨리까지 다섯이었다. 그저께 장을 보기 위해 저녁으로 무슨 요리를 할까 미리 계획했는데 발터의 '그 닭고기를 매운 소스에 요리해서 큰 야채랑 같이 먹는 것'을 요청했다. 닭갈비에 상추쌈. 우리가 먼저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본 후에 즉흥적으로 근처에 사는 조지와 그의 새로운 데이트상대 마리아를 초대한 것이라 그들의 취향을 고려할 수 없었다. 조지는 잘 아는 사이니 괜찮았는데 마리아의 식성이나 알레르기를 물어보니 유제품과 글루텐이 들어간 밀가루요리를 안 먹는단다. 다행히 닭갈비는 요리조리 피해 성공.
독일사람 여럿이 모이면 취향도 식성도 제각각이라 개별적으로 잘 물어봐야 하는데 음식은 닭갈비로 어찌어찌 통과했으니 다음은 음료를 얘기할 차례이다. 우리는 우리가 먹고 싶은 레드와인 한 병을 사놓았는데 여럿이 모이면 더 마시게 될 수도 있으니 손님에게는 가벼운 음료를 부탁한다. 대부분 호스트가 요리를 준비하면 손님은 음료나 디저트를 챙겨 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지는 어떤 음료가 좋을지 물었고 우리는 닭갈비를 준비했으니 알아서 가져오라고 했다. 결국, 레드와인을 마시지 않는 조지는 화이트와인과 맥주를 들고 왔고 그의 소개로 처음 만나는 마리아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며 논알코올 샴페인과 탄산수를 준비해 왔다. 밥을 먹고 게임을 하며 제각각 자신이 준비한 음료를 마신다.
사실 나와 발터는 조지가 데려올 마리아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단, 오랫동안 연애를 하지 않은 조지를 잘 알기에 어떤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는지 매우 궁금했고 기대하고 있었다. 친절하고 세련된 자연스러운 밝은 블론드/은발머리의 키가 큰 마리아는 차분하면서도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서 수줍음이 없었다. 술을 안 마시고 유제품과 글루텐을 안 먹는다는 정보에 꽤나 까탈스럽지는 않을까 했는데 그저 우리의 편견이었다.
저녁은 베를린에 살고 계시는 엄마와 먹는다고 식사시간이 훨씬 지나 뒤늦게 도착한 헨리는 고급진 레드와인과 맥주를 들고 왔다. 누구보다 깔끔하고 프로처럼 요리를 잘하는 헨리이다. 20년이 다 돼가는 동성연인 시몬과 바젤에 살아 자주 보진 못해도 가끔 보면 밤새 수다가 가능한 따뜻하고 재미있는 게이친구이다. 볼 때마다 헨리의 눈이 유난히 반짝반짝 빛난다고 생각한다.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결정이 빠르며 남과 다른 자신의 의견을 상냥하고 논리적으로 전하는 그의 에너지가 눈을 통해 보인다. 공감능력이 매우 높은데 동시에 아닌 것은 아니라고 명확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자존감이 매우 높은 게 분명하다. 가끔 유난해도(특히 요리에) 사랑 가득한 사람이다.
고작 5명이지만 개개인의 스토리가 꽤나 흥미로운데 '전통적인 가정'이나 '헤테로'는 발터와 나한테 밖에 적용이 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이들과의 수다에서는 별세계 같은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게 세상은 넓고 모두는 제각각의 삶이 있음을 매번 새롭게 느낀다. 이야기가 길어지니 별세계 스토리는 다음 편에 쓰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