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빈틈없이 흰 눈에 덮여있었다. 아, 겨울.

눈이 좋다기보다 나의 세상이 순식간에 새롭게 변화하는 것이 좋다

by 조희진


아침에 눈뜨면 요가메트 깔고 20분은 운동하던 날들이 있었는데. 출근을 하던 때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그 시간만은 지키고자 했었다. 조금 더 부지런할 땐 20분 스트레칭 후 30분 아침 조깅까지 하고 사무실도 갔더랬지. 조금 더 일찍 일어나는 힘듦보다 몸을 움직이고 여유롭게 준비하는 만족감이 더 큰 나는 자연스럽게 아침형 인간의 루틴이 좋았고 남들보다 일찍 침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열 번도 넘게 겪고 있는 베를린의 겨울에는 장사 없다. 역시 모든 루틴이 무너지고 있다. 올해만 유독 심하다는 것이 아니고 십수 년째 겪어도 나아지지 않는다.


11월 12월까지는 겨울의 첫 상반기라고 본다. 베를린의 겨울은 11월부터 2월 혹은, 3월까지라고 봐야 하니까. 4-5개월이 겨울인 이 나라에서 가장 힘든 건 겨울의 하반기이다. 1월, 2월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픈 곳은 없는데 아픈 것 같다. 몸에 기력이 없고 일에 집중할 수도 없고 모든 의욕이 사라져서 정신도 희미해지는 것 같다. 몇 년 전에는 큰 병이 생긴 건 아닌지 의사를 찾았는데 피검사를 하고 상담 후 받은 처방은 비타민 D였다. 그 후, 작년엔 철분도 추가 처방받았다. 즉, 병은 아니고 그냥 겨울인 것이다.


이렇게 여기저기 겨울의 불만을 토로하고 있을 즈음 새해가 밝았고 눈이 내려줬다. 엊그제 아침도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겨우 눈을 뜨고 슬로모션처럼 느릿느릿 침대에서 몸을 빼내는데 집이 환했다. 빛이 밝혀주는 환함과는 다르게 온화한 꿈같은 환함이 맞이해 주는 아침이었다. 창 밖에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고 이미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 온 세상이 빈틈없이 흰 눈에 덮여있었다. 아, 겨울. 겨울이 싫은 마음이 최고조에 다달 할 때쯤 소설 속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로맨틱한 장면으로 이 싫어하는 마음을 싹 무너뜨렸다. 겨울은 아름답고 온 세상 곳곳에 로맨스가 숨어있을 것 같고 예상치 못한 사랑이 피어나는 계절이다.


애증의 겨울. 정신과 몸이 무너져내리는 안타까움이 있을지언정 이 아름다움을 저버리고 싶진 않다. 눈으로 덮인 세상은 힘이 있다. 하루아침에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준 것 마냥 다른 감정과 다른 에너지로 오늘을 살게 하는 힘. 눈이 이렇게 좋으면 멀지도 않은 스웨덴, 노르웨이로 겨울여행을 자주 갔겠지만 또 그런 것도 아니다. 눈이 좋다기보다는 내가 아는 나의 세상이 순식간에 새롭게 변화하는 것이 좋다. 어제 걸어왔던 도로가 더 이상 보도블록이 아닌 도톰하게 깔린 새하얀 눈길이 되고 집 앞의 흐르는 강은 더 이상 빛을 반짝이며 흐르지 않는다. 그 대신 얼어붙은 강물 위로 눈이 쌓여 어디까지가 육지이고 어디까지가 강물인지 멀리서 보면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다.


내가 익숙한 세상이 낯설게 보인다. 심지어 아름답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무얼 하지 않아도 새로움을 경험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이 아름다움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창밖의 풍경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한없이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핸드폰을 찾아들고 사진을 찍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동네 아이들의 사진들이 수십 장이더라.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르고 뛰어다니고 끊임없이 썰매를 끌고 올라가 내려오기를 반복하는 아이들. 나도 저 에너지를 가진 적이 있었을까. 저녁이 되면 뜨끈뜨끈한 음식을 앞에 두고 빨간 볼때기를 하고 꾸벅꾸벅 조는 아이의 모습을 영화나 광고에서 본 적은 있지만 나도 그랬을까 모르겠다.


너무 예뻐서 추운지도 모르는 날들이다. 아무것도 안 해도 예쁜 세상에 있을 수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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