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파동으로 다가가기를, 시원한 바람이 되기를.
온전히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다채로운 감정을 홀로 끌어안고 몸부림치며 사는 모든 사람에게 내 몸부림이 아주 작은 파동으로 다가가기를. 그저 조금 시원한 바람이 되기를. 그래서 나는,
한 번쯤, 남겨진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9시가 조금 넘었다.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오빠 꿈을 꿨다. 실로 오랜만에 꾸는 꿈이다. 오빠는 느긋하게 배를 내민 채 안방에 누워 자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배를 훤히 드러낸 오빠에게 이불을 덮어주려 했던 것 같다. 시원하게 걷어찬 이불을 발로 누르고 있어 쉽게 덮어주지 못하고 낑낑댔다. 아빠가 안방으로 들어서며 오빠를 깨우려 하기에 그냥 자게 두라고 말하고는 둘이 함께 퇴장했다. 그리고 꿈에서도 퇴장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꿈을 곱씹고 있자니 오랜만이라 반가운 마음과 혼자 태평한 듯한 모습에 왠지 억울한 마음이 뒤죽박죽 뒤섞였다.
우리 오빠는 18년쯤 전에 죽었다. 내가 스무 살, 오빠는 스물두 살.사망 원인은 심장마비. 병원 장례식장 전광판을 보니 오빠가 가장 어렸다. 스물두 살이라. 정말 좋을 때, 창창할 때 갔구나. 아니, 내 20대를 떠올려보면 그다지 좋다거나 창창하다거나 파릇파릇하지 않았으므로 꼭 좋을 때라고는 할 수 없겠다. 내 20대에 드리워져 있던 수많은 그림자 가운데 오빠가드리운 그림자도 꽤 깊고 진했으므로 오랜만에 꿈에 나타나 태평하게 누워 있던 오빠가 조금은 얄밉게 느껴졌다. 뭐가 예쁘다고 이불은 덮어주려고 했대? 참, 나.
여전히 누운 채 손을 뻗어 요즘 읽고 있는 책을 집어 든다. 사노요코 할머니가 쓴 《사는 게 뭐라고》. 굉장히 솔직하고 귀여운 할머니다. 자신의 상황과 생각과 느낌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낄낄대며 읽는데 할머니가 한국 드라마에 푹 빠진 이야기를 시작한다. <겨울연가>부터 <가을동화>, <호텔리어>, <올인> 등 익숙한 드라마 이야기가 펼쳐진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본 것도 있고, 제목만 아는 것도 있고, 띄엄띄엄 본 것도 있다. 그중에 나에게도 잊을 수 없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가을동화>. 사노 할머니는 이 드라마에서 반듯하게 잘생긴 원빈을 발견했지만 나는 이 드라마를 떠올리면 늘 같은 시간, 같은 장소로 되돌아간다.
오빠 장례식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건 일요일이었다. 추석 며칠 뒤였으므로 본격적인 가을로 막 들어서기 전이었다. 부모님과 나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정도로, 아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의 무기력이 우리 셋을 짓눌렀다. 일도 하지 말고, 학교도가지 말고 우리 며칠 쉬자. 그렇게 의기투합하고는 한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잠이 들었다.
그때 우리는 부엌 겸 거실 하나에 방 두 개가 딸린 집에 살고 있었다. 오빠와 나는 방을 함께 썼다. 한 명은 침대에서 자고 한 명은 바닥에서 자는 식으로 작은 방을 공유했다. 183센티미터인(아마도 오빠는 185센티미터라고 우기겠지만) 커다란 오빠와 170센티미터인 등빨 좋은 내가 방 안에 함께 있기라도 하면 그 공간이 꽉 차는 듯 느껴졌다. 서로 침대에서 자겠다고 자리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먼저 누운 사람이임자지만 우리에게 그런 룰은 통하지 않았다. 힘으로 빼앗는 자가 승리한다는 적자생존의 법칙 아래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사이의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곤 했다. 지키려는 자가 벽에 몸을 밀착시킨 채 떨어지지 않으려고 용을 쓰면 빼앗으려는 자는 지키려는 자와 벽 사이를 파고들며 벽과 몸을 떼어놓으려고 용을 썼다. 지키려는 자의 힘이 강하면 빼앗으려는 자는 침대 밖으로 튕겨 나갔고, 빼앗으려는 자의 힘이 강하면 지키려는 자가 침대 밖으로 떼구르르 굴러나갔다. 다 큰 것들이 저러고 있다고 혀를 끌끌 차도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둘 다 침대에서 자고 싶었다.
치열했던 자리다툼이 끝나면 종종 승자는 침대에 누워 패자는 바닥에 누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와 아빠의 관계, 친척들과 우리 가족의 관계 등에 관해 이야기했고 스무 살 주변을 맴돌던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힐 때면 오빠는 밖으로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들어왔다. 오빠가 담배를 피울 동안 나는 뭘 하고 있었더라? 아마도 혼자 천장을 노려보며 누워 있었을 것이다. 1999년부터 2000년까지, 2년이 조금 못 되는 그 시간 동안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 오빠와 가장 사이좋게 지냈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마지막 선물 같은 그런 시기였다. 서로를 소 닭 보듯 하던 사춘기를 보내고 다소 자란 남매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시기. 서로를 소 닭 보듯 하던 사춘기를 보냈음에도 옛날 버릇 못 버리고 침대에서 밀어내기 싸움이나 벌이던 시기.
그 방에 오빠가 쓰러져 있었다. 심장이 멈춘 채로. 패자가 누워서 자던 바닥에. 패자가 누워 자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그 방에서 혼자 잘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누운 안방으로 파고들었다.
월요일과 화요일, 집에서 쉬며 텔레비전만 봤던 것 같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움직이는 화면만 지켜봤다. 그리고 밤 10시,<가을동화>가 시작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가슴속에서 휘몰아쳤다. 오빠가 늘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던 곳에 내가 누워 있는데, 집에 있던 오빠는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고,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데, 울고 싶어도 부모님 앞에서 내가 먼저 울면 안 될 것 같고, 그래서 참고 있는데, 적당히 슬픈 드라마가 시작했고, 심지어 재밌기까지 하고…. 어쩌면 <가을동화>는 오빠가 없는 세상을 살기 시작한 날, 내가 평생 지워지지 않을 그리움을 간직하기 시작한 날의 시작점 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에효. 천장에도 책 속에도 곳곳에 오빠가 있다. 자꾸만 불쑥불쑥 튀어나와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귀찮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이제 그만 생각났으면 좋겠는데 딱 그만큼의 크기로 계속 머물러 있었으면 좋겠다. 나 책 좀 읽게 잠깐 딴 데 가서 놀고 있어. 이따 부르면 와. 그렇지, 절대 내 말을 들을 오빠가 아니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던 사노 할머니는 2010년 72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나와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던 우리 오빠는 2000년 22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사노 할머니는 세상을 떠난 지 8년이 지났음에도 바다 건너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에게까지 기억되고 있다. 우리 오빠는 여전히 내 머릿속에서만 왔다 갔다 할 뿐이다.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이 모두 죽으면 우리 오빠를 떠올릴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겠지. 그게 괜스레 분하고 억울하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내 앞에는 세 명의 면접관이 앉아 있었다. 소설 부문 문학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원서를 낸 후 간단한 백일장을 치르고 면접을 봤다. 그때 한 교수님께서 이렇게 물었다.
“어떤 글을 쓰고 싶어요?”
사실 평소에 어떤 글을 쓰고 싶다고 진지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일기를 써왔고, 책 읽는 걸 좋아했고, 국어와 문학 시간이 반가웠고, 시도 끄적거렸고, 종종 독후감을 써서 상을 받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누군가에게 칭찬을 듣고 상을 받은 분야는 글쓰기밖에 없었다. 나는 당연히 글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게, 잘한다고 느끼는 게 그것뿐이었으므로. 글쓰기는 그렇게 당연하게 내 안에 있었고, 당연하니까 어떤 글을 써야겠다, 어떻게 써야겠다는 고민을 깊이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입에선 이런 말이 술술 튀어나오고 있었다.
“호수 위에 물방울이 떨어지면 잔잔한 파문이 일듯 제 글을 읽는 누군가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이 대답 때문인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난 대학에 합격했다. 누군가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단 한 명이라도 내 글을 읽고, 어떤 식으로든 감정의 동요를 느낀다면 참, 정말로, 고맙겠다. 그런데 어쩌나. 나는 아직도 다른 사람의 마음엔 가닿지 못하고 내 마음만 울렁울렁한 글을 쓰고 있으니. 오빠 꿈을 꾸고 하루 종일 울렁울렁거리고만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