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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주 Nov 15. 2018

"또 만나자"

후회가 아닌 추억이 남기를.


우리가 당연하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안녕, 내일 보자”라는 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 “이따 만나”라는 말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를 종종 떠올린다.
ⓒ 조성민

추석 이틀 뒤가 오빠의 기일이다. 명절이라고 북적거리는 다른 집과 달리 우리는 추석이 다가오면 오히려 추모의 분위기 속으로 침잠한다. ‘하필이면 명절 근처에…’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람이 때를 봐가며 ‘내일은 추석이니까, 설날이니까, 크리스마스니까 며칠만 참았다 죽어야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전국을 뒤덮은 즐거움과 흥분의 한가운데에서 슬픔을 견디는 건 어쨌든 남은 이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추석 당일에는 대부분 마트가 문을 닫으므로, 추석 전날이나 추석 다음 날 산소에 가져갈 물품을 사러 간다. 나는 과자 담당이다. 오빠와 가장 자주 과자를 나눠 먹은 사람이 나고, 오빠와 과자를 두고 가장 많이 경쟁했던 사람 또한 나이며, 오빠의 과자 심부름을 가장 많이 다닌 사람도 나이기 때문이다. 오빠의 과자 취향을 가장 잘 아는 쫄따구로서 과자 구입에 투입된다.


초콜릿이 묻어 있는 다이제스티브, 롯데샌드, 촉촉한 초코칩, 썬칩 등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이게 요즘 인기래. 오빠도 한번 먹어봐’라는 심정으로 허니버터칩, 바나나맛 초코파이도 고른다. 오빠가 좋아했던 과자를 사며 문득 나의 죽음을 생각한다.


내가 죽으면 누군가가 지금의 나처럼 평소에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사겠지. 우선 나는 감자를 좋아하니까 소금을 넣고 찐 찐감자를 가져오면 좋겠다. 과자는 파란색 포카칩 한 봉지면 되고, 손발이 노랗게 되도록 먹고 또 먹던 새콤달콤한 귤도 있으면 좋겠다. 소보로빵, 초콜릿, 투게더 바닐라맛….


근데 오빠는 왜 과자를 자기 책상 서랍에 숨겨뒀을까? 늦은 밤 슈퍼는 문을 닫고, 집에 주전부리는 없는데 배는 꼬르륵거리고 입이 심심해 몸부림칠 때면 오빠가 스윽 자기 방에 들어가 과자를 한 봉지씩 꺼내오곤 했다.


언젠가는 라면을 끓여 대령해오라기에 니가 끓여라, 네가 끓여라, 이번엔 니 차례다, 저번에도 내가 끓였다 티격태격하다 결국 내가 부엌 앞에 서게 되었다. 싱크대를 뒤지니 라면이 딱 한 개만 남아 있었다. “오빠, 라면 하나밖에 없는데? 내가 끓이니까 오빠가 얼른 가서 사 와.” 내 말을 들은 오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뭔가 음모의 냄새를 맡고 오빠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오빠는 맨 아래 책상 서랍을 열고는 라면을 꺼냈다. “이게 뭐야!” 책상 안에는 라면은 물론 과자, 초코바 따위가 잔뜩 들어 있었다. “치사한 인간 같으니. 내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사실 많이 먹긴 했습니다) 혼자 먹으니 맛있냐?” 나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오빠를 흰 눈으로 째려보았다. 물론 오빠의 비밀곳간을 알게 된 후론 집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몰래 훔쳐 먹긴 했지만.


산소에 도착하면 음식을 놓고, 술을 올리고, 먼저 부모님과 함께 할아버지 할머니께 절을 올린다. 그리고 나만 혼자 술을 올리고, 오빠한테 절을 한다. 오빠한테 절을 할 때마다 늘 내 머릿속에선 이런 대화가 오간다. “내 절 받으니까 좋으냐?” “어. 좋아. 고개를 더 깊이 숙여라. 좀 더 공손하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서 절을 하도록.” 거만하게 앉아서 나를 약 올리는 얼굴이 보이고, 목소리가 들린다.


음식을 펼쳐놓고 산소 앞에 있는 밭과 저 멀리 우뚝 솟은 산, 파랗디파란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은 시원하지만 햇빛이 따가워 과자 위에 덮인 초콜릿이 녹기 시작한다. 파란 하늘을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눈으로 쫓다 문득 나의 죽음을 생각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슬퍼하길 바랐다. 나를 잃은 것에 가슴 아파하면 좋겠다고, 끊임없이 울고, 나에게 상처 준 것을, 나에게 잘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좀 다르다. 내 장례식이 열린다. 장례식장 문 밖에서부터 노랫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신발을 벗고 장례식장 안에 들어서면 최대한 예쁘게 나온 내 사진이 보인다. 그 사진을 보고 어떤 사람은 풋, 웃음을 터뜨리고, 어떤 사람은 저게 누구냐고 야유를 보낸다. 보정 너무 심하게 한 거 아니야, 내가 장례식장 잘못 찾아온 거 아니야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농담을 한다. 장례식장 안에는 내가 평생 팬이었던 가수, 우리 이승환 옹과 국카스텐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음악을 들으며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한다. 그때 안희주가 어떻게 했는데, 걔 표정이 진짜 웃겼어. 그때 진짜 바보 같지 않았냐? 그건 정말 부끄러웠지. 그래도 참 착하긴 했어. 나를 안주 삼아 수다도 떨고, 평소 잘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나로 인해 오랜만에 만나 자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도 하면서. 그렇게 한바탕 놀다 갔으면 좋겠다. 웃으면서 날 보내주었으면 좋겠다.


몇 년 전의 나는 아마 사람들에게 상처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를 해침으로써 내가 상처받았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나를 해침으로써 나를 더 많이 사랑해주지 않은 걸 후회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다.


지금은 그저 나를 아꼈던 사람들이,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나를 알았던 사람들이 내가 언제 어떻게 떠나더라도 너무 아파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주섬주섬, 음식을 싸서 다시 가방에 담는다. 돗자리도 접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한다. 오빠, 안녕. 또 만나자. 잘 놀고 있어. 돌아서서 집으로 향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안녕, 내일 보자”라는 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 “이따 만나”라는 말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를 종종 떠올린다. 내일 보지 못할 수도 있고, 다니러 갔다 오지 못할 수도, 이따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당연한 이 말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벼락처럼 찾아온다. 그걸 마음에 새기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순간을 소중히 하자고 다짐한다. 물론 그렇다고 내일 당장 죽어도 후회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지는 않는다. 나는 늘어져 있는 걸 좋아하고, 이불을 사랑하는 천생 게으름뱅이라 내일 당장 죽으면 안 되는데 싶을 만큼 허술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래도 때때로 번쩍 정신을 차리고 탓하는 말 대신 예쁜 마음이 담긴 말을 건네려고 노력한다. 번쩍번쩍 정신 차리는 시간이 잦아지면 내일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다니러 갔다 오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따 만나지 못하더라도 후회가 아닌 추억이 남게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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