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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주 Nov 22. 2018

내가 나로 살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어려울 거 없어. 그냥 남들이 하는 대로, 하라는 대로 살면 돼.

그때부터 생각했다. ‘폭력’이라는 것에 대해.
물리적인 폭력만 폭력이 아니라, 거친 말을 쏟아내는 폭언만이 폭력이 아니라
누군가를 나의 뜻대로, 개인을 전체의 뜻대로 조종하려는 것 또한 폭력이 아닐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공동체를 파괴하지도 않으며,
그저 개인의 취향과 선택일 뿐인 문제에서도 해라, 하지 마라 간섭하는 것 역시
폭력이 아닐까? 


나는 편식쟁이다. 어릴 때부터 늘 콩밥에서 콩을 골랐고, 계란프라이에서 노른자를 골랐다. 고기는 무엇이든 잘 먹었지만 해산물 앞에선 고개를 돌렸다. 남들은 짭조름한 바다향이 나는 게 진짜 맛있는 거라며 먹어보라고 권했지만 나에겐 그저 비린내 나는 음식일 뿐이었다. 식사 예절만큼은 엄격하게 가르쳤던 부모님도 편식에는 관대했다. 내가 골라놓은 콩이나 노른자는 늘 엄마 입으로 들어갔다.


관대함의 뿌리에는 ‘먹성 좋은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과자를 먹다가도 밥상이 차려지면 한달음에 달려와 밥 한 그릇을 뚝딱하는 아이들이었고, 반찬 몇 가지 안 먹는 모습은 복스럽게 잘 먹는 모습에 가려지기 마련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겠지만 음식을 골라 먹는 데 뚜렷한 기준은 없다. ‘비린내 나는 음식은 잘 먹지 않는다’가 기본 바탕이라면 바탕일까. 감자는 좋아하지만 물에 빠진 감자는 좋아하지 않고, 채소는 대부분 좋아하지만 익힌 채소에는 잘 손을 대지 않는다. 해산물은 거의 먹지 않지만 또 게, 새우, 흰 살 생선은 먹고, 고기는 좋아하지만 곱창, 닭 껍질, 비계, 육회는 먹지 않는다. 내가 봐도 기준이 없으니 주변 사람들이 내 입맛에 “근본 없다”며 투덜대도 할 말은 없는 셈이다.


요네하라 마리는 《미식견문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인 대다수는 일본 음식을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일상적으로 어패류를 거의 먹지 않는 내륙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생선회며 초밥이며 오징어 같은 것을 먹는 데 상당히 용기가 필요한 도전이다. 음식은 자기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처음 보는 음식을 먹을 때는 무의식적으로 본성이 나온다. 그 사람의 호기심과 경계심 사이의 균형감각이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미지의 것에 얼마나 마음을 열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리트머스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요네하라 마리의 말처럼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혁신과 보수를 나눈다면 나는 보수, 그것도 극보수에 속할 것이다. 처음 보는 음식, 바다 생물을 재료로 한 음식, 색깔이 이상한 음식, 날것의 음식은 무조건 의심하고 경계할지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극보수주의자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배식받은 음식을 남김없이 먹는 걸 모든 아이가 지켜야 할 ‘약속’으로 정했다. 그리고 그날 식판 위엔 미역줄기가 있었다. 바다에서 나고 자랐을 게 분명한 그 음식과 나 사이엔 바다만큼이나 먼 거리가 가로놓여 있었다. 젓가락이 쉬이 가지지 않았다. 다른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도 미역줄기는 처음 모습 그대로 식판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이걸 먹지 않으면 난 분명 ‘약속’을 지키지 않은 나쁜 아이가 되어 선생님께 혼이 날 거야. 두려움이 내 등에 손을 얹고 속살거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젓가락을 들고 미역줄기를 집어서 입안에 넣고 씹어 삼키면 돼. 그럼 넌 혼나지 않아도 되고, 음식을 골라 먹는 나쁜 아이라고 손가락질당하지 않아도 돼. 아무거나 잘 먹는 건강하고 착한 아이가 되는 거야. 자, 어서 먹어.


풍덩. 두려움에 떠밀려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입으로 코로 바다향이 밀려 들어오고 비린내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코를 말아 쥐고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였다. 이만하면 됐겠다 싶어 꿀떡 삼키려는데 미역줄기가 목구멍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또 한 번 시도해봤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미역줄기는 입안에서 돌덩이처럼 단단히 자리 잡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있다가는 음식을 골라 먹는 나쁜 아이가 아니라 음식을 골라 먹을 뿐 아니라 밥을 먹다 갑자기 토한 더럽고 나쁜 아이가 될 것만 같았다. 결국 씹다 만 미역줄기를 휴지에 뱉어내고 말았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바닷속에 뛰어들었던 나는 제자리에서 버둥대다 짜고 비린 바닷물만 실컷 먹고 물 밖으로 기어 나왔다. 물에 흠뻑 젖은 채 처절하게 가쁨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옆에 앉은 짝꿍이 이런 나를 가련하게 여기어 내 식판 위의 미역줄기를 먹어주었고, 나는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별일 아닌 것 같은 이 사건은 내게 돌덩이처럼 단단한 확신을, 어쩌면 비릿한 변명을 심어주었다. 편식은 단순히 좋고 싫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몸이 확실히 거부하는 음식도 있다는 것, 그러니 음식은 강요해선 안 된다는 것.


“얘 가리는 음식 엄청 많아요. 아무거나 다 먹게 생겨서 의외로 까다로워요”라는 말을 무시로 들으며 30여 년을 보냈다. 그러다 몇 년 전에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 이제부터 채식할 거야.” 비장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이 대부분, 늘, 그렇듯 충동적이었다. 마침 채식이 유행이었고, 헬스장에서 개인 PT를 받으며 식단 조절을 하다 보니 채식도 할 수 있겠는걸,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런 심리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나를 괴롭히는 자학의 심리, 내가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괴롭힐 때 느껴지는 쾌감의 심리 같은 것. 어쨌든 그렇게 채식을 시작했다.


채식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 페스코(Pesco), 폴로(Pollo), 락토 오보(Lacto Ovo), 오보(Ovo), 락토(Lacto), 비건(Vegan). 그중에서도 나는 조류를 포함한 고기를 먹지 않고, 유제품, 계란, 해산물은 먹는 페스코를 선택했다.


작정은 했으나 페스코로 살기란 의외로 쉽지 않았다. 고기를 먹을 땐 미처 몰랐다. 주변에 고기가 이렇게 많은지. 막상 먹으려 할 땐 없더니 먹지 않으려 하자 주변에서 시뻘건 고기들이 달려드는 형국이었다. 식당에 가면 찌개에도 국에도 고기가 들어 있었고, 고기는 덩어리가 아니면 국물에 스며들어 존재감을 뽐냈다. 설마 했던 비빔밥에도 다진 고기가 올라갔고, 믿고 시킨 해물짬뽕에서도 길게 저민 소고기가 튀어나와 날 조롱했다.


도시락이 대안이었으나 당시는 직장에 다닐 때라 동료들과 점심을 먹어야 할 때도, 저자와 식사를 해야 할 때도, 회식에 참석해야 할 때도 있었기에 페스코로서의 내 삶은 머리 위에서 굴려 내려오는 돌을 피하기 바쁜 나날이었다. 고깃집에 가면 밥과 김치, 된장찌개로 끼니를 해결하고, 가능한 한 고기 대신 생선을 먹고, 어쩔 수 없는 경우 육수 안에 든 채소만 건져 먹으며 채식을 이어갔다.


고기를 먹고 싶다는 욕망을 참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오르면 당장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아니고, 먹고 싶은 음식 자체가 별로 없는 데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미식가도 아니다. 그렇다 보니 꽃등심이, 삼겹살이, 치킨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도 곧 사라져버렸다. 더구나 고기에도 중독성이 있는지 먹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먹고 싶은 마음 또한 점점 줄어들었다. 사실 진짜 고난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채식을 선언한 뒤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왜?”였다. 물론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을 터이나 대부분 그 말투 속에는 단단한 돌멩이가 들어 있었다. 나를 설득하지 못할 정도의 이유라면 그냥 먹으라는, 괜히 까탈스럽게 굴지 말라는, 너 하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불편해진다는 돌멩이…. 채식은 왜 해? 고기 안 먹으면 기운 못 써. 채식하면 너 연애 못 한다. 돌멩이는 다양한 방향에서 다양한 각도로 날아왔다.


갑자기 세상의 풍경이 바뀐 기분이 들었다. 따뜻하게 손 내밀어주던 세상이 차갑게 등을 돌린 느낌, 그 따뜻했던 손에 돌멩이를 움켜쥐고 언제든 던질 준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 그냥 한 발을 세상 밖으로, 경계 밖으로 내밀었을 뿐인데 이런 기분이 느껴진다면, 언제든 그 발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내가 이런 기분을 느낄 정도라면, 아예 경계 밖에 나가 서 있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은, 경계 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기분으로 살아가는 걸까? 두려워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생각했다. ‘폭력’이라는 것에 대해. 물리적인 폭력만 폭력이 아니라, 거친 말을 쏟아내는 폭언만이 폭력이 아니라 누군가를 나의 뜻대로, 개인을 전체의 뜻대로 조종하려는 것 또한 폭력이 아닐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공동체를 파괴하지도 않으며, 그저 개인의 취향과 선택일 뿐인 문제에서도 해라, 하지 마라 간섭하는 것 역시 폭력이 아닐까? 내가 불편하니 네가 희생해라,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해라, 너의 취향을 다수에게 맞추라는 건 폭력이 아닐까. “며칠 굶어봐야 이것저것 안 가리고 먹지”라는 말 속에는 상대방을 이해하겠다는, 너의 삶을 상상해보겠다는 마음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 그저 상대의 머리채를 잡고 광장으로 끌어내 비웃고 조롱할 뿐이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서는 고기를 먹지 않는 영혜의 입을 벌리고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는 가족이 등장한다. 어느 날 꿈을 꾸고, 그 꿈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 영혜가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비쳤으리라. 영혜는 고기를 먹이려는 가족들 앞에서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한다.


영혜가 채식을 하게 된 근원에는, 그 꿈을 꾸게 된 뿌리에는 고기 맛을 좋게 한다며 오토바이 뒤에 개를 묶고 그 개가 쓰러져 목숨을 잃을 때까지 멈추지 않던 아버지의 모습, 유독 영혜에게 손찌검이 잦았던 아버지의 폭력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채식을 시작한 영혜는 시간이 지나면서 음식을 아예 거부하고 스스로 나무가 되려 한다. “나 몸에 물을 맞아야 하는데. 언니, 나 이런 음식 필요 없어. 물이 필요한데.”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언젠가 한 선배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인간은 왜 타인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 할까요?” 한참을 가만히 생각하던 선배가 답했다. “그게 인간의 본성 아닐까?” 타인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폭력이라면, 타인의 선택을 무시하고 내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폭력이라면 인간은 왜 이렇게 폭력적인 걸까? 그것도 인간의 본성인 걸까? 우리는 왜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때리고, 부수고, 상처 주고, 아프게 할까?


영혜는 육식 안에 내포된 폭력성을, 나중에는 먹는다는 것에 내포된 폭력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그것이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행위다. 다른 생명을 희생해 내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폭력적인 것이리라. 먹어야만 살 수 있고, 살기 위해 먹으려면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성이리라. 우리가 폭력적인 이유는, 살아 있는 한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생각해보면 의식주가 모두 폭력이다. 입는 옷에도 사는 집에도 무언가를 죽이고 빼앗는 행위가 수반된다. 그것이 자연에게서든 인간에게서든.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의 폭력인 셈이다. 한없이 겸손하고, 또 겸손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이 조금씩 허리를 숙인다.


나의 페스코 생활은 3년 만에 막을 내렸다. 혈액 속 철분 수치가 계속 평균을 밑돌아 특단의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얼마 전부턴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고기를 먹으러 다니고 있다.


사회에는 다수가 정한 ‘약속’이 있고, 그걸 지켜야 ‘좋은 사람’이 되는 거야. 어려울 거 없어. 그냥 남들이 하는 대로, 하라는 대로 살면 돼.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도 종종 두려움이 내 등에 손을 얹고 속살거린다. 남들도 다 뛰어들었으니 너도 어서 바닷속으로 들어가라고 등을 떠민다. 하지만 이제 나는 무턱대로 뛰어들지 않는다. 비린내는 싫으니까 우선 엄지와 검지로 코를 막고 바닷가에 서 있다. 난 수영 못 해. 물에 들어가면 죽어.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나 다 들어가라고 하지 마. 더불어 남의 등을 떠밀지 않으려, 손잡고 같이 뛰어들지 않으려 조심한다.


내가 나로 살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당신이 당신으로 살도록 놔두기도 의외로 쉽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이 맞고 너무 많이 때려서 폭력에 무감각해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은 차치하더라도 우선 나는 내가 조금 더 자유롭고, 조금 더 겸손해지면 좋겠다. 속수무책으로 떠밀리지 않도록 땅에 단단히 발을 디딘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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