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생활력과 아빠의 사고
엄마는 5남매의 맏이, K-장녀였다. 엄마 말로는 동생들 학교 보낸다고 중학교까지밖에 못 나왔다고 했다. 내가 어릴 때에는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를 했었는데 나는 엄마 아빠의 최종학력이 중학교인 것이 창피했다. 같은 반 친구가 모두 보는 앞에서 해당하는 학력에 손을 들어야 했다. 다른 집 부모는 최소한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는데 우리 엄마는 중학교 졸업, 아빠는 사실 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지조차 모르겠지만 내 기준에 적당한 거짓말은 중학교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늘 항상 언제나 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말하면서도 엄마의 생활력은 멋지다고 생각했다.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일도 아마 내가 국민학생일 때였지 싶다. 그 당시 농사를 크게 짓고 계시던 할배(외할아버지)가 그해에 농사를 망쳤다며 정성스레 키웠던 작물들을 트랙터로 다 밀어버린 일이 있었다. 우리집은 외갓집과 걸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사계절 내내 틈만 나면 외갓집 논밭에 농사일을 도우러 가거나 별로 놀 거리가 없어 심심할 때 그저 산책 삼아 다니곤 했었다. 할배가 얼마나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지 잘 알고 있는데 그 작물을 스스로 없애버리다니, 엄마는 너무 놀라 바로 배추밭으로 뛰어갔고 옆에 있던 나도 덩달아 함께 뛰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그 넓은 밭의 작물들이 대부분이 갈려나간 뒤였고 한쪽에 배추와 무가 조금 남아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손을 휘저으며 '아부지! 아부지!'를 외쳐댔고 한참이 지나서야 트랙터는 멈추었다.
''여 뭐 하러 왔노! 가라! 돈도 안 되는 거 다 갈아엎고 치야뿌게!''
''아부지, 카지 말고 일단 내려오이소.''
배추 한 포기, 무 한 개도 항상 소중히 다루던 할배였는데 뭐 때문인지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엄마는 할배의 팔을 붙잡고 일단 내려오란 말만 되풀이했다. 나는 다 갈려서 못쓰게 된 배추와 무를 보는 것도 슬펐고 울고 있는 할배와 엄마의 표정도 슬펐다. 할배는 눈물을 한번 훔치고 트랙터에서 내려와 터덜터덜 집 쪽으로 걸어갔다. 할배를 따라 함께 나와있던 할매는 할배 뒤를 따라 집으로 갔고 나와 엄마는 아직 살아있는 배추와 무를 줍기 시작했다.
''가서 할매한테 구루마 달라 캐서 갖고 온나.''
엄마가 남은 작물들을 한 곳에 모으는 동안 나는 잔심부름을 했다. 리어카에 차곡차곡 쌓은 무와 배추를 포대로 덮은 뒤 노끈으로 잘 고정했다. 나는 엄마 뒤를 따라 시장통에 들어섰고 엄마는 작물을 덮었던 포대를 벗겨 시장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배추와 무를 다시 차곡차곡 잘 쌓았다. 워낙 좁은 시골동네에다가 누구집 숟가락이 몇 개 인지도 아는 형편이라 시장통에도 각자의 자리가 있게 마련이었는데, 원래 장사를 하지 않는 엄마가 판을 깔고 배추를 팔고 있으니 온 동네 사람들이 구경하듯 모여들었다.
''안 그래도 이번에 *** 때문에 농사짓는 사람들 다 난리 났다 카든데 느그 집도 그거 땜에 카나? 아부지 우짜고 계시노?''
''집에 드갔는데 모르겠어예. 다 갈아엎고 이거 남았는데 아까바서 우짜노, 내라도 팔아야지.''
''아가 옆에 있어가 그냥 가기도 글코, 하나 줘봐라. 빨리 팔고 드가라.''
엄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사람들에게 인사만 꾸벅꾸벅하고 있는 내가 신기해 보였는지 아는 어르신들은 이래저래 한 마디씩을 보태고 무와 배추를 사갔다. 그때 나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그 일에 관심이 없거나 딱히 뭘 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외갓집에서도 할배의 생활력을 내려받은 건 엄마와 중간삼촌 정도였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그해 여름은 집중호우로 우리집이 물난리에 잠겨버렸고 재해보상도 거의 받지 못했다고 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던 외갓집에 우리를 보내놓고 엄마 혼자 물 빠진 집에서 살릴만한 것이 있는지 살림을 뒤집고 다녔는데 그때 우리 어릴 적 사진 앨범이 물에 젖고 녹아서 다 버렸다고 했다. 물에 잠긴 집에서는 건질만한 것이 없었고 우리 가족 여섯 명은 말 그대로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어 외갓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게 아마 7~8월, 그렇게 엄마가 백방으로 뛰어서 이사 갈 집을 겨우 구했고 철이 없던 우리는 그해 9월에 데뷔한 아이돌그룹 H.O.T.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엄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모르겠고, 일단 나는 그저 물이 콸콸 나오는 세면대가 있는 새로운 집이 신기했다. 엄마는 이사를 하고도 어린 자식들이나 집안일에 관심 없는 아빠에게 불평 한마디 없이 새로운 집을 정돈해 나갔다. 그 악착같은 생활력으로 사고만 치는 아빠 뒷바라지를 그렇게 열심히 했었다.
'그동안 내가 벌어온 돈이 얼만데!'라고 소리치는 아빠에게 '그 돈 이미 사고 쳐서 없어진 지 오래다!'라고 되받아치는 일도 있었지만 아빠는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아빠가 벌어 온 것보다 사고로 여기저기 물어준 돈이 더 많을 것이다. 돈이 없어서 물어줄 형편이 안 되었을 때는 엄마가 보험사에 가서 무릎을 꿇고 울며 빌며 사정도 했다고 했다. 사고가 났다 하면 음주운전이었기 때문에 온전히 아빠의 잘못이었고 우리집은 그걸 해결할 돈도 없었다. 그런 상황을 수십 번 겪고도 엄마는 아빠를 살리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머리 뚜껑이 열려서 가망이 없다고 했는데도 엄마는 아빠를 살려냈다. 차라리 그때 죽어버렸으면 엄마가 이렇게 고통만 받다가 죽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 징글징글했지만 우리집에서는 그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회사에서 다 같이 오케스트라 공연 관람을 한 뒤 회식을 하기로 했던 어느 날, 공연을 보는 도중 기분 나쁜 진동이 느껴졌다.
'아빠 또 사고 났대'
그래, 어째 요즘 조용하다 했다. 나는 문자를 확인하고 너무도 자연스러운 한숨을 쉰 뒤 미동 없이 공연을 계속 관람했다. 머릿속에는 이미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했지만 회사에서 다 같이 온 것이니만큼 분위기를 흩트리고 싶지 않았다. 사실 어릴 때였다면 놀라서 바로 뛰어나왔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껏 너무 많이 겪어온 일이라 놀랍지가 않았다. 그때는 내 명의의 차를 남동생이 쓰고 있을 때라, 기차를 타고 엄마집에 가려면 아직 기차시간도 남아있었다. 하루에 몇 대 안 다니는 기차 중에서도 막차 하나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가끔 이렇게 다 같이 공연 보는 것도 좋은 거 같네.''
''팀장님 이제 밥 먹으러 가요~''
공연이 끝나고 술 마실 생각에 들떠있는 사람들 가운데 나는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팀장님 죄송한데 저 아빠가 사고 났다고 해서요. 먼저 들어가 볼게요.''
''사고 나셨다고? 어쩌다가!''
''예…. 뭐…. 자주 있는 일이라 너무 안 놀라셔도 돼요.''
''어…. 그래…. 내일 쉬는 날이니까 잘 갔다 와.''
'집에 전등을 안 끄고 나왔어요.' 수준의 건조한 내 말투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나를 제외한 팀장 이하 직원들이었고, 나도 상상이상으로 덤덤한 내가 이상했지만 일단은 엄마가 또 아빠 뒷수습을 하고 있을 테니 나는 얼른 엄마를 보러 가봐야 했다. 일단 차를 갖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엄마집에 도착해 차키를 챙기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 구미 순천향병원에서 대구 경대병원으로 이동했다고 했다. 나는 내 차를 타고 대구로 다시 이동해 엄마를 만났고 엄마는 하루 종일 제대로 된 밥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 당시 엄마도 큰 수술을 몇 차례나 받고 항암치료를 다니던 중이어서 평소에도 밥이 쉬이 넘어가지 않았을 때였다.
''가라, 고마.''
''엄마 밥도 안 먹었다매. 근처에 뭐 있나 함 보고 오께.''
병원 근처에 보이는 건 24시간 김밥집뿐이었고 급한 대로 김밥과 오뎅을 주문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날씨가 꽤 쌀쌀했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에 아무 준비 없이 뛰쳐나와 덮을 이불 하나도 없는 서늘한 한밤중 응급실에서 아빠를 돌보고 있는 엄마를 보고 있자니 허파가 뒤집어졌다.
''안에서는 못 먹으니까 나와서 먹자.''
''느그 아빠 봐야 되는데….''
''뭔 일 있으면 부르겠지. 일단 나와 봐. 다리 아픈데 좀 앉아봐봐.''
머리 뚜껑이 열렸다는데 죽지도 않았다. 정말 징글징글했다. 엄마는 아빠가 사고를 낼 때마다 곧 죽을 거라는 의사의 선고에도 어떻게든 아빠를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차라리 그때마다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다. 아빠의 생명이 연장될수록 엄마의 수명은 줄어들었다. 우리가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할 때부터 쉬지 않고 오토바이 사고를 낸 아빠의 기억은 열손가락에 꼽꼬도 지쳐서 더 이상 세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사고를 내고도, 못 쓰게 된 오토바이 대신 새로운 오토바이를 사 왔다.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오토바이만 타고 다녔는데 하다 하다 오토바이 가게 사장님이 엄마에게 남편분이 또 오토바이를 사갔다고 말해줄 정도였다. 정신을 차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차라리 자동차 면허를 따라고 그렇게 말해도 오토바이의 편리성 때문인지 오토바이만 고집했다. 오토바이 사고를 그렇게 냈는데 차라고 사고를 안 낼 리 없겠지만, 나는 매번 마음을 졸이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게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