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024년 겨울은,
아주 완벽한 겨울이었다.
졸업 논문을 손에서 완벽히 털어낸 뒤부터는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영화와 공연을 체력이 허락하는 선에서 열심히 보러 다녔고, 이제는 '당연히'가 된 것 같은 연말 가족 모임이 열렸으며, 제철 대게를 산지에서 꼭 드셔야겠다는 어머니와 함께 짧게 동해 여행을 다녀온 후 설 명절 휴가를 아주 기-일게 보냈다.
그리고 대망의 대학원 졸업식은 온 가족이 모여 축제처럼 거창하게 즐겼다. 내 평생에 이렇게 즐겁고 행복하며 기억에 남는 졸업식은 다시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적고 보니 나의 4기 유방암 투병 라이프에서 대학원은 아주 중요한 포지션에 있는 것 같다.
병으로 인하여 대학원 휴학을 하며 '난 이제 끝났다'라는 깊은 절망을 느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복학을 하며 '어쩌면 나도 다시?' 라는 희망의 씨앗을 심을 수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쏟아부은 결과물을 손에 쥐고 하게 된 대학원 졸업은
또다른 인생의 챕터를 열 수 있는 발판과 자산이 되어 주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 건강이 아닌 일상에 좀 더 집중을 하고 살 수 있는 이유는 지금 현재까지는 건강에 특별한 이슈가 발생하고 있지 않아서일 수 있다. 사소한 이슈들(이를테면 '양쪽 무릎 관절은 대체 왜 번갈아가며 속을 썩이는가'와 같은)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늘 함께 해야 하는 반려 증상 같은 것들이라 상황이 벌어져도 그런가 보다 하며 크게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하는 편이고, 투병 라이프에서 새로운 챕터로 넘어가야 하는 무거운 이슈는 감사하게도 아직까지는 잠잠한 상태라 요즘은 문득문득 내가 4기 암환자라는 사실마저도 잊고 지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회피' 혹은 '부정'이 되면 결코 긍정적인 방향은 아니기 때문에 한 번씩 내 마음을 스스로 돌아보고 있는데, 확실히 그쪽 결은 아니다.
환자로서의 자각을 가끔 잊고 지내는 요즘의 생활이 긍정적인 쪽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가 지금껏 살아온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지금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이게 참.. 가끔 내가 나 스스로를 생각할 때도 어이가 없다 싶은 것이, 어째서 지금이 가장 행복할 수가 있냐는 말이지. 객관적인 지표들만 놓고 봤을 때는 난 지금 우주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어도 크게 틀리지 않은 수준인데.
그런데 지금의 나는 거짓 없이 행복하다.
하고 싶었던 대학원 공부를 이런 몸을 해가지고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올 겨울 동안 정말 원 없이 늘어지게 쉬어도 봤으며(생전 안 하던 게임을 엔딩까지 봤다지), 그야말로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으니 어찌 불행할 수 있겠는가.
사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해야 했지만, 이 부분마저도 현재 동생과 '창업'이라는 형태로 뛰어든 상태. 창업이라는 것이 결국은 모 아니면 도이기 때문에 이걸 통하여 앞으로의 나의 삶이 풍요로워질지 어떨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직장에 적을 두고 주 40시간을 붙들려 있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던 상황에서 '무언가를 도모하면서도 내 건강과 내 시간을 내 컨디션에 맞게 쓸 수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선택지.
무엇보다도 일단... 재미있다. 동생과 지난 1년 여간의 시간 동안 나눴던 대화 속에서 만들어지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구체화해 나가는 과정이 재미있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재미있다. 둘이서 하는 거라도 첫 시작은 제대로 해야 한다며 굳이 굳이 호텔 라운지에서 시무식을 한 것부터 이미.
요즘 동생이 내게 간간이 하는 말이 있다.
"나는 행복 총량의 법칙이란 말을 믿는데 그 관점에서 보면 누나는 지금까지 힘든 일이 정말 많았기 때문에 앞으로의 누나의 삶에는 좋은 일들이 많이 벌어질 수밖에 없고, 나는 그게 정말 기대된다."
2022년 8월 마지막 날, 학기 시작 하루 전 내 손으로 휴학 버튼을 클릭하며 "이제 좀 사는 게 재밌다고 느끼며 신나게 살고 있었는데 왜 또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다 빼앗아가느냐"며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펑펑 울었었는데 이제는 조심스럽게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한 앞날'을 기대하고 있다. 사실 지금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긴 한데 지금보다 좀 더 여유롭게 행복을 즐길 수 있다면... 어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완벽한 겨울을 보냈고,
움트는 봄을 맞이했다.
그리고 나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