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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 암환자가 왜 이리 밝냐면요 - 2

by 희나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희망'이 주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 그전까지는 곧 시들어서 똑 떨어질 것 같은 이파리같이 세상 모든 슬픔을 다 떠안고 있는 것처럼 지내던 내가 '대학원 복학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면서부터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이 정도로 공부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나.

스스로도 낯설고 다소 어이없기도 한 심경의 변화였으나 어쨌든 그 변화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그 변화가 나의 투병 라이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겁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다.

스스로를 보호하겠다는 명목 하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 대하여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려 노력하는 한편, 그 반대쪽의 상황은 될 수 있는 한 떠올리지 않는 방법을 취하며 평생을 살아왔었다.

언뜻 보면 이 방법이 되게 긍정적인 것처럼 보이고, 또 대체적으로는 이렇게 살아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데, 문제는 지금의 나와 같이 극단에 가까운 상황에 처했을 때는 도무지 저 생각의 흐름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나는 지금의 상태를 잘 유지하면서 오래오래 잘 살 거야"를 생각해보려고 해도 이미 나의 몸이 "너 이렇게 아픈 건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확실한 증거야"를 잔인하리만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는 상황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뒤로 밀어둔 채 긍정만을 끈질기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생각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 건 이 즈음이었던 것 같다.

4기 암환자인 내가, 생업도 포기하고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를 대학원으로 돌아가는데, 예전과 같은 마음이라면 분명히 도중에 퍼질 것 같은 위기의식이 느껴졌던 것.

그동안 내가 행해왔던 방식을 근본적인 것부터 바꾸지 않으면 난 언제고 다시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 대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찾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것만 보려고 노력하고 부정적인 것은 무시에 가깝게 밀어뒀던 것.


사실 긍정과 부정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어서 둘을 결코 따로 놓고 볼 수 없는 것이었는데, 그동안의 나는 계속 동전의 한쪽 면만을 붙들고 이 면이 나오지 않으면 나는 큰일 난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부정적인 것들을 직시하게 되면 겁 많은 내가 혹여나 영영 주저앉게 되지 않을까를 걱정하느라 실제 그런 일들이 내 삶에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예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와 같이 생각이 정리되고 나니 "그럼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부정적인 것은 무엇이 있는지를 정리해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히 생각만 하는 것보다는 메모를 하여 그것을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생각 정리에는 훨씬 도움이 되기에 펜과 종이를 꺼내 들고 앉았다.


예전에는 '원하는 곳으로 이직을 못하는 것'이라든가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하는 것'과 같이 미시적인 것들이었는데, 이제 내 삶에서 부정적인 것은 '약에 내성이 생겨 더 이상 쓸 수 있는 약이 없는 상황'과 '그로 인하여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되는 것'처럼 그야말로 생사를 두고 고민하는 수준으로, 그 범위가 클 뿐만 아니라 삶의 본질을 두고 돌아봐야 하는 것들이라는 것이 눈에 확 들어왔다.




생사의 본질이 지금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부정적인 요소라는 걸 눈으로 보고 나니 '그럼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서 더 의미 있게 잘 살아야겠구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병을 이기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 잘 버텨달라고 했던 동생의 절실한 응원을 내가 내린 결론과 엮였다.


"결국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이 세상을 떠나기 마련이고 다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나는 나의 죽음의 시기를 나름대로 예상하며 목표를 설정할 수 있고 그 기간 동안 잘 살기 위해 노력할 테니 어쩌면 다른 이들보다 더 의미 있게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의미 있는 하루하루를 잘 쌓아서 잘 버티다 보면 언젠가 도달해야 할 곳에 도달할 테니 나는 그저 오늘 내게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게 잘 쓰는 것에 집중하여 잘 살아보자."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나니 병 진단 이후 지난 몇 개월 동안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었던 나를 조금씩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각종 매체에서 시쳇말로 "그래봐야 죽기밖에 더하겠나"라며 각오를 다지는 말이 나에게는 엄청난 응원의 메시지였다. "그래, 여기서 더 안 좋아진다고 해봐야 죽는 것밖에 없는데 뭐가 무서워"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속에서 뭔가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겁 많은 내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생각이 다다른 것인지는 지금도 여전히 미스터리지만, 암튼 뭔가 하나를 뛰어넘은 느낌만은 확실했다.




가끔,

그때 만약 대학원이 아닌 생업을 선택했다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어디까지나 가정이기에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처럼 씩씩하고 밝게 살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척'하며 살고 있겠지.

내일 당장 죽을 것은 아니기에 이제는 본격적으로 생업에 대한 고민과 실행이 절실한 상태이긴 하지만, 이제는 "이 또한 무슨 방법이 생길 것이니 너무 고민하지 말고 일단 뭐든 하자"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고 보면 이 암이라는 병, 정말 요물 같다.

사람한테서 희망을 일소에 빼앗아가버리더니,

어쨌든 이 병 덕분에 그간 가지고 살았던 가치관을 변혁에 가까운 수준으로 바꾸었으니 말이다.


앞으로 내게 얼마의 시간이 더 허락될지는 모르겠지만,

사는 동안은 내가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고 신나게 잘 살 것이다.

요즘의 내가 밝은 이유 역시 이에 기인하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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