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해본 적 없는 사랑을 하겠다. 경우는 당장 상대를 찾기 위해 잠들어 있는 핸드폰 화면을 켰다. 끓어오르는 마음이 무색하게 간단한 행동이었다. 한동안 지우고 거들떠보지 않았던 만남 어플리케이션을 깔았다. 경우는 자신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사람처럼 텅 빈 프로필 란을 채워 나갔다. 먼저 엄선한 사진, 하지만 자연스러운 것으로 몇 장 골랐다. 사진이 올라가는 속도는 경우의 결단력처럼 막힘이 없었다. 자유롭게 자기소개를 하는 란에는 “지혜로워지기 위해 무지해지는 일”이라고 타이핑 했다. 취미 란을 누르자 객관식의 목록이 간편하게 나열됐고 거기서는 음악감상과 등산, 차 마시기를 골랐다. 여기까지 작성하고 나자 어플리케이션은 사용자의 위치에서 가까운 순으로 다른 사용자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랑으로의 항해를 함께할 상대를 찾기 위해 경우는 사진만 보고 예스 오어 노어 골랐다. 외모뿐 아니라 사진에서 풍겨오는 아우라를 직감적으로 판단했다. 고정된 취향은 없었다. 그저 느낌이었다. 왠지 좋을 듯한, 왠지 별로인 사람을 나누는 데는 3초의 시간도 들지 않았다. 경우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하지만 지난 날 쌓은 데이터베이스가 믿을 만한지는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제법 많은 여자들을 만났던 것 같은데 얼굴과 이름, 직업이 매치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지나간 과거는 머리를 살짝 흔들면 떨어져 나가는 먼지에 불과했다. 좋고 싫음을 손가락으로 표현하는 동안 몇몇은 마음이 통해 대화창이 열리기도 했다. 하단의 빨간 숫자가 알림음을 내며 깜빡였지만 경우는 손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소리와 함께 진동이 끊이지 않을수록 손짓은 경쾌해졌다. 더 많은 사랑의 기회를!
단 하나의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여자를 필요로 했다. 경우는 더 많은 여자를 만날수록 사랑을 찾을 가능성이 커진다고 믿었다. 믿음을 비웃듯 한 대화창이 경우를 부르고 있었다. 익명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곳에서 누군가 경우를 경우라고 부른 것이다. 여자는 자신을 요조라고 소개했다. 나 기억나? 흐릿한 이름이었다. 오랜만이야. 애매하게 대답하는 경우에게 여자는 아랑곳 않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요조가 말하길 과거에 경우에게 큰 상처를 줬다고 했다. 그게 어떤 상처인지를 떠나 요조가 누구였는지조차 기억에 없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경우가 아는 요조가 지금의 요조인지 알 수 없었다. 요조는 말했다.
[ 그때 내가 너무 미숙해서 너에게 상처를 입혔어. 오랫동안 네게 사과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마주칠 일이 없었네. 어플에서 익숙한 사진을 보고 용기를 내 문자하는 거야. 네가 잘 지냈으면 좋겠다. 멋대로 연락하고 사과해서 미안해.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
자신에게 불현듯 사과를 건넬 만한 상대가 있었는가 잠시 되짚어보았다. 서로 주고받은 상처들이 무수히 많았지만 경우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어떤 게 내가 준 상처이고, 어떤 게 내가 받은 상처인지 따져보는 일이 무색해지는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줬다고 생각한 상처가 사실은 받은 상처였을지도 모르고, 받았다고 생각한 상처보다 더한 것을 사실은 내가 타인의 살갗 깊숙한 곳에 새겨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래서 경우는 괜찮다, 고맙다, 나도 네가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답장했다. 대화는 끝났다. 새 출발을 막 시작하려던 경우는 조금 김이 새서 핸드폰 화면을 닫고 베개맡에 던져버렸다. 목 부근이 뻐근해져오는 게 느껴졌다. 나에게 상처를 줬다고 믿는 요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말을 다시 걸어보려 했지만 대화가 끝났다는 알림과 함께 채팅창이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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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승은 고속버스를 타고 도를 넘어서 왔다. 그때는 사이트에서 여자들을 만났다. 줄글로 자기소개를 쓰고 사용자 아이디를 눌러 쪽지를 보낼 수 있었다. 실시간으로 알림이 오는 게 아니라 사이트를 새로고침 해야지 쪽지가 온 걸 알 수 있는 시대기도 했다. 경우는 짧은 글을 쓰고 꽤 많은 쪽지를 받았다. 어떤 식으로 해야 읽는 사람의 흥미를 끄는지 노련하게 알 수 있었다. 경우는 자신에 대해서 전부 쓰지는 않되 장점과 단점을 적절히 밝혀 썼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답장을 써서 보낸 게 은승이었다. 경우가 휴학 중인 해에 은승은 재수에 성공했다. 한국문학을 전공하는 경우가 같은 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는 은승을 사이트에서 마주칠 확률은 몇 프로나 될까? 지역을 밝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만났다. 경우가 사는 도시에서 대낮에 맥주잔을 기울였다.
은승은 피부건강이 좋지 못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울긋불긋한 피부를 파운데이션으로 겨우 가렸으나 술기운이 올라 소용이 없었다. 당시로서는 신박하게 맥주잔을 얼려서 얼음맥주를 파는 곳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건물 2층을 통으로 쓰는 프랜차이즈 호프였다. 그때 은승은 안 그래도 비쩍 마른 몸에 폴로셔츠를 입고 있었다. 딱 붙는 스키니진까지 은승을 더 말라 보이게 했다. 당시에 경우는 그의 붉은 피부가 신경 쓰였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마저도 사랑의 근거가 되었던 듯싶다. 껑충 큰 키와 짧고 얇은 머리칼, 쑥스럽게 웃는 얼굴 그 어떤 것도 사랑의 이유는 아니었다. 수많은 사랑의 근거가 있지만 그것의 총합이어야 사랑하는 이유를 조금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너무 늦은 순간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것이다. 뭐든 내가 사랑한 너였다는 걸.
적당히 취기가 오른 두 사람은 절에 가자 했다. 버스가 자주 오가지 않는 외딴 옆 도시에 있는 사찰이었다. 길은 포장이 되다 만 데다 비가 그친 뒤라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처음 만난 은승의 발에 원인불명의 수포가 돋는다는 것을 경우는 알지 못했다. 다만 은승이 신은 빛나는 듯하던 흰색 컨버스화가 뒤늦게 신경 쓰였다. 은승은 경우의 얼굴을 빤히 보느라 자주 비틀거렸고 웅덩이에 컨버스화가 빠지기도 했다. 그 눈빛을 다음 생에도 기억할 것 같았다. 긴 도로변을 걸어 사찰에 도착했을 때 연못에는 연꽃이 울창했다. 연꽃의 키는 왜소한 경우의 어깨까지 자라 있었다. 이제 막 시작된 무더위에 두 사람은 그늘을 찾아 앉았다. 사찰의 꼭대기 계단에 앉아 두 사람은 기념품관에서 함께 산 염주만 만지작거렸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미워하며 증오하게 될 앞날을 모른 채.
경우는 은승과 미끄러지듯 연애를 시작했다. 메신저 채팅창에 어눌한 영어로 같이 걸을까? 물었다. 말뜻을 곧바로 이해한 은승은 좋다고 답했다. 연애를 시작하자고 말하지 않아도 연애를 시작하게 됐다는 점이 경우는 흡족스러웠다. 자신이 쌓은 서사가 훌륭한 하나의 작품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은승의 방안에 꽂힌 책들의 제목이 떠올랐다. 푸른색의 방 벽지도 만져지는 듯했다. 은승의 핸드폰을 구경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둘은 낮술을 함께 즐겼고 그날도 그중 하나에 불과한 하루가 됐을 수 있었다. 하얀색 폴더폰으로 은승이 찍은 사진들을 구경하며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평범한 일요일이었을 수도. 하지만 많은 사진들 가운데 한 여자의 영상이 찍혀 있었다. 경우는 단박에 은승의 입을 통해 들었던 전애인이라는 걸 알아챘다. 찍은 사람과 찍힌 사람 사이에 오가는 사랑스러운 기류로 알 수 있었다. 경우는 입을 다물었다. 은승은 당황했다.
많은 연애가 기승전결의 법칙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법칙은 다른 누구도 아닌 경우 자신이 만든 서사라는 것도 함께 알았다. 어쩌면 요조는 경우의 과거에서 나온 인물이 아닐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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