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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알려줘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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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오 Aug 29. 2024

<야무나에게> -완-

며칠 전 인터넷이 끊어지고야 말았다. 바깥세상에 두려움보다 싫증이 앞설 때였다. 집 문을 두드리는 너의 세찬 발길질과 간헐적인 노크소리가 이제는 익숙했다. 기다리던 네가 왔는데. 문을 열 수 없다. 열어선 안 될 것만 같다. 거기에 서 있는 게 네가 아니라거나 죽은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통신이 끊긴 채 지속하는 칩거는 더 이상 칩거가 아니다. 고립이었다. 나는 살아나가야 했다. 우스웠다. 그렇게 들끓던 자살충동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건지. 죽음이 턱 끝까지 쫓아옴을 느끼자 자기보호본능이 발동한 듯했다. 나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런데 나가면 어디를 가야 하는가 생각하다가 너를 좇기로 한 것이다. 들키면 죽기 전인데 뭘 못하겠느냐고 하자. 네가 좋아하는 파란 시스루 원피스도 입고 공들여 화장도 했는데 뭐 어쩔 건가. 웃고 말겠지. 너를 다시 마주친 건 불 꺼진 핸드폰 매장 앞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나를 떠난다. 너처럼 보는 앞에서 등을 보이거나 내가 못 보는 사이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해본다. 모든 게 내 잘못인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반성하는 시간을 보낸다. 놓치지 말아야 한다. 너의 속도와 동선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묻고 싶다. 왜 반성하고 기다린 나를 버렸는지. 지친 사랑이 돌아올 수 없이 흘러가버렸는지. 우리가 함께 사랑했던 이 동네를 왜 다시 찾아왔는지. 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발바닥이 뜨겁다.

어쩌면 내 사랑은 병적이다. 꿈 속 장면처럼 응고됐다 풀어지는 숱한 감정들. 그것들을 한 가지로 부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포기한 지 이미 오래다. 명백히 사랑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이 아닌 걸까. 병적으로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없는가. 지금도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환통을 느끼고 있는데. 역시나 환통이기 때문에 증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상관없이 그것은 오로지 나의 고통이다. 이토록 너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것을 받는 네가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자주 함께 뛰었다. 뛸까. 물으면 너는 내 손을 잡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대답이 필요 없었다. 깔깔 웃으며 숨 가쁘게 뛰면 그만이었다. 초록불이 깜박일 때마다 나는 물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너는 나를 놓치고 말았으니까. 급작스레 뛰고 싶은 충동은 곧잘 들었다. 뛸까. 너는 한 번도 주저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아주었다. 혼자 있을 때면 걷는 것조차 위태로웠던 내가 가장 자유로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란히 뛰던 우리는 어디로 달려가버린 걸까. 이제는 너를 뒤쫓는 구차한 내 모습만 건물 유리문에 비친다.

마지막 섹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의 행위를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내 몸 세포 하나하나 살아서 너를 느낄 수 있던 관계는 그날로 끝이었다.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를 다녀왔었다. 단거리 주행이었지만 뽑은 지 얼마 안 된 차로 간 초행길이었기에 너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선한 바람을 마신 탓에 애정이 끓어올랐지만 손가락 까닥하기가 싫었다. 너는 내가 원치 않을 때나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때에만 야릇한 분위기를 유도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친밀함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네 손가락은 점차 개수를 늘여 내 안으로 들어왔다. 머릿속과 달리 쉽게 젖어드는 스스로가 수치스러웠다. 너는 물티슈로 손가락을 꼼꼼히 닦으며 말했다. 우린, 속궁합이라도 잘 맞아서 다행이다. 그리고 곯아떨어졌다.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이튿날이 되었는데도 음순까지 퉁퉁 부어 있었다. 흉측했다. 크기나 모양보다도 굴욕 속에서 본연의 제 모습을 찾지 못하는 몸뚱이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쓰라렸다. 아프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돌아올 대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오래 전 이름 붙이고 더 이상 부르지 않는 애칭.

딸기가 이상해. 개불 같아.

그걸 왜 나한테 말해? 돌아온 답이었다. 곧이어 내가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미쳐갔고, 불안했고, 매달렸다. 언덕을 올라 호흡이 거칠다. 이것만이 우리가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너는 모퉁이를 돌아 막다른 골목 입구에 다다른다. 네가 홀연히 뒤돌아선다. 재빨리 안주머니 속 식칼을 쥔다. 입 안 가득 달큰한 피 냄새가 퍼지는 것 같다. 나를 향해 있지만 딴 곳을 보는 것 같은 너의 두 눈을 바라본다. 어쩌면 너는 죽은 왕비를 위해 타지마할을 지은 왕의 기다림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내 말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던 거다. 내 생각을 존중한다는 뜻으로. 야무나 강 쪽으로 함께 걸어주는 것으로 그 표현을 대신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언제나 너를 알고 싶다. 누군가에 대해 안다는 것은 일과를 꿰뚫고 있다는 단순한 차원이 아닐 것이다. 네가 행복과 불행 중 어느 쪽을 더 탐미하는지, 눈앞에서 버스를 놓쳤을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같은 것들. 자주 죽고 싶었다. 네가 나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다는 예감으로 괴로운 기분이 자주 드는 때였다. 샤워 후 미처 치우지 못한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네가 나를 떠날 만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망상했다. 이따금 혼자 남게 된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때마다 너는 한 번도 나를 사랑한 적 없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나는 깡그리 잊는다. 네가 나를 떠났다는 것, 이유를 불문하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금까지 가져왔던 불안한 징조들이 현실이 되었을 때 나는 명징한 결말을 맞이한 듯 다소 달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칼날을 감싼 신문지를 벗겨낸다. 너는 평소보다 더 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이다. 그토록 궁금했던 표정은 비어 있고 벌어진 입으로 가래 끓는 것 같은 소리를 낸다. 이 기자와 아빠처럼, 옆집 캄보디아 아내처럼. 죽어서 영영 나를 잊었을까. 우스꽝스런 생각이 스쳐간다. 죽은 건 네가 아닌가. 어느 쪽도 너였다. 더없이 아껴주었던 사람도 남보다 못하게 나를 막대했던 사람도 전부 다. 내 작은 호흡이나 걸음에도 신경을 기울인 사람도 너고 편도선이 부어 밥알을 삼키며 눈물 흘리는데 게걸스럽게 식사하던 사람도 너지. 그래도 마침내 우리가 깨달을 거라고 굳게 믿어왔다. 네가 나를 함부로 대하는 데는 이유가 있고 나는 이 종교를 배신해서는 안 되고. 화가 나면 괴물이 되던 나도 넌 미치지 않았다는 인정 하나면 잠잠해질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내 화가 타당하다고, 그렇게 분출한 방식은 잘못이지만 네 감정은 진짜라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용인가. 나는 모두가 미쳤다 해도 너에게만 미치지 않은 사람이길 원했다.

왜 이제 왔어.

한 달 동안 들어본 적 없는 내 목소리다. 네 표정이 변한다. 나에게 웃어줄 리 없다. 잔뜩 일그러진 안면근육은 생기가 없다. 악취도 난다. 달려드는 너를 보며 생각한다. 죽어도 너는 나를 기억하는구나. 식칼을 들어. 손을 다치지 않으려면 칼날은 아래를 향해야 한다. 가느다란 목에 물어뜯긴 자국이 선명하다. 누가 또 너를 증오했을까. 피는 까맣게 굳어 있다. 거기에 내리 꽂는다. 앙상한 손이 힘을 다해 내 어깨를 움켜쥔다. 칼날을 빼낸다. 다시 어깨에 꽂는다. 칼 손잡이에서 칼날 쪽으로 손바닥이 밀려 내려간다. 너의 이 사이사이 썩은 살점이 보이고 너는 나를 뜯어먹으려 필사적이다. 만약 다시 인간이 된다면 미친 건 너였다고, 타인의 인생을 박살낸 건 내가 아니라 너였으며 우리의 진실한 사랑을 짓뭉갰다고, 나를 먹고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고 그 모든 잘못을 빌어줄까. 그래줄까, 너는. 사랑니 빠져나간 자리로 칼날이 깊숙이 들어가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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