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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알려줘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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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오 Aug 28. 2024

<야무나에게> -3-

뜻밖에 동행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계획에 없던 길을 택했다. 한국 여행서적에는 딱 두 페이지. 고빨뿌르는 그런 곳이다. 배낭여행 족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바닷가 마을을 다음 행선지로 택하고 일행과 헤어져 우리는 둘이 남았다. 뿌리에서 기차를 다시 한 번 갈아타야 하는 일정을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나는 차츰 네 친절에 마음 흔들려했다.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눌 때면 나를 쳐다보느라 꼭 무언가에 부딪혀 바보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단 한 번 놓치는 일 없는 그 눈빛이 선했다. 넘어질 걸 알면서도 자세를 바꾸지 않는 모습 때문에 나는 가슴 한쪽이 뻐근해지곤 했다. 단 둘이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을 초입에 위치한 식당에서는 10대 형제 둘이 해산물 요리를 만들어 내왔다. 검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싼 값에 해산물을 잔뜩 먹고 우리는 기분이 좋아졌다. 어둑해진 어촌 풍경에도 무섬증 없이 어느 때보다 편안한 한때를 보내던 곳. 그곳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것을 기억할까. 제복을 입은 소년들이 바다위로 연을 띄웠고, 실이 끊어져 연을 잃어버려도 함께 깔깔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나 빠른 걸음걸이를 가졌던 나는 차츰 너의 느린 걸음에 맞춰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현지인처럼 동네를 한참이고 걸어 나가 싼값에 과일을 사오는 일도 더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동시에 끝을 예기한 행복이란 것도 의식할 수 있었다. 우린 서로를 참 몰랐다. 모른 채 사랑에 빠졌다. 다른 사랑은 어땠는지 까맣게 잊었다. 하얀 시트가 깔린 녹슨 침대 위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키스를 나누었으며 내일을 계획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신은 왜 인도였어?

낙타의 혹이 보고 싶어서. 실없는 말을 하고 너는 웃었다. 여전한 바보처럼.

옷걸이가 무너졌다. 나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다친 곳은 없었다. 그저 내동댕이쳐진 자리에 누워서 눈만 끔뻑였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한 옷걸이가 쓰러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무슨 짓을 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지만 금세 괴로워졌다. 비참하고 참담했다. 이 기분 속에서 누구라도 구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너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너는 오지 않는다. 다른 일로 관심을 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내 관심은 너의 관심을 나에게로 돌리는 일밖에 없었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사막처럼 계속되는 욕구였다. 허탈하게 웃다가 엉거주춤 일어서서 수면유도제를 먹었다. 자고 일어나면 네가 와 있을지도 모른다. 남은 기력을 모아 잠을 잤다.

알갱이 같은 색색의 입자들이 조각조각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모든 색이 그렇듯이 노란색도 양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따뜻하면서 동시에 과민한 여자를 연상케 한다. 조각과 색으로 이루어진 꿈을 꾸면서 꿈속의 나도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해 있다. 그것은 매번 다르지만 맹목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날 꿈은 네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향해 산산이 부서졌다. 조각과 색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불분명한 어떤 것이. 마치 분열을 일으키는 세포처럼 화려했다. 붉고 노랗고 파란 세포가 일렁이더니 커다랗게 폭발했다. 의식이 들었을 때 옆에는 네가 누워 있고, 무너진 옷걸이는 세워져 있었다. 한없이 너그러운 눈동자를 참을 수가 없었다. 너를 꼭 껴안았다. 아무 데도 가지 않을게. 너를 해치지 마. 그러면 나는 감격에 젖는다. 어느 때보다 너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다. 새우처럼 몸을 말고 겨우 기운을 차려서 다리 한 짝을 너에게 올렸다.

잠든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누구도 미워할 수가 없대.

그럼 봐줘. 내 잠든 얼굴.

작은 소리로 네가 웃었다. 나는 진심이었는데. 네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에게로 향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이어진 너의 말.

엄마랑 어린 여동생이 잠들어 있었어. 나도 잠이 설피 오고 있었지. 그땐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출근해서 여자들뿐이었어. 엄마랑 여동생 숨소리만 들려오는 오후를 잊을 수가 없어. 대낮인데 도둑이 들었어. 배관을 타고 우리 집 창문을 열고 있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얼굴을 가리지 않아서 그 표정이 다 보였어.

나는 다리로 너를 더 옥죄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나는 흥분해서 이야기했어. 그런데 묵묵히, 밥을, 드셨어.

아무 말도 않으시고?

아무 말도 않고.

그때 무슨 위로도 하지 못했다. 아무 말이 없는 나에게 네가 말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나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어.

세상에 대수롭지 않은 일이란 게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대수로운 순간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뒤 오래오래 곪는다. 우리 연애도 대수로운 어떤 순간을 놓쳐버린 거다. 거기서 극명하게 앓아 누운 게 내 쪽이었을 뿐. 너를 떠나는 대신 나는 네 옆에서 죽어가기를 택했다. 너는 나를 벗어나서 사는 것을 거듭 시도하는 중이었다. 성공했다면 너의 선택이 명백히 옳았을 테고, 나는 너의 뛰어난 생존본능을 격려했을 것이다. 떠나지 않는다는 말은 계속될 거짓말이었다.

뒤를 한번 돌아보는 일 없이 너는 걷는다. 발이 아파오는 것을 느낀다. 꼭 맞는 워커가죽이 발바닥을 후벼 패는 것 같은 통증이다. 앞서 걷는 네 생각과 기분은 알 수 없다. 길이 굽어질 때마다 뺨이 살짝 보이지만 표정은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표정들, 어쩌면 알아채지 못했을 찡그림. 아무리 상상해봐도 오래도록 바라본 뒷모습만이 내가 아는 네 전부인 것만 같다. 내가 아는 너는 너의 전체 중 얼마쯤에 해당될까. 너의 전체라는 것은 또 무엇인지. 우리가 헤어진 건 내 예상 밖의 너를 용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답을 골라내야 하는 오이디푸스처럼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반면 나는 스핑크스처럼 어울리지 않는 사자 다리를 들이밀곤 했다. 모든 걸 기억한다.

낯선 여자가 네 팔짱을 끼고 가슴을 밀착한 채 내 쪽으로 걸어오는 장면이었다. 낯설지만 알 수 있었다. 여자는 너의 지난 연인이었다. 땀에 흠뻑 젖어 깼다.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너를 흔들어 깨웠다. 너무 생생했기 때문에. 그 느낌 하나로 너를 괴롭히려는 중이었다. 몇 번째일지 모를 망상이었고, 나는 차츰 꿈과 현실을 구분키 어려워했다. 네가 여자에게 돌아갈지 모른다는 불신감. 얼빠진 너를 보며 사방에 있는 물건을 바닥에 던지기 시작했다. 난장판이 되어가는 집을 볼수록 흥분돼갔다. ‘우리 집’ 같은 건 없는 듯했다. 잠에서 깨 망연히 앉아 있는 네 표정을 보면, 그건 더해졌다. 간밤의 소동이 지나고 나면 나는 두려움에 빠졌다. 횡포 끝에 밀려오는 죄책감은 스스로를 더욱 압박했다. 빌었고, 불안했고, 다시 횡포였다. 그 시절 내내 유령과 싸우고 있는 기분이었다.

삼 년 동안 너는 수없이 많은 이별을 고했다. 지인들은 내 불안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그렇게 빌지 않아도 돌아올 걸.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운명을 결정짓는 신이 등을 보였는데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불행히도 그 말이 옳았다. 매달리기에 지쳐갈 때면 네 블로그에는 나와 관련한 사진이나 음악, 일기 따위가 업로드 되었다. 바로 그 타이밍에 죽을힘을 다해 매달리면 너는 돌아왔다. 태도는 네가 나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마지못해 부족하고 쓰레기 같은 나를 감싸주겠다는 식이었다. 마치 나쁜 종교처럼. 불신은 죄였으므로 부당하다고 느낄 때마다 더더욱 속죄했다.

열아홉 번쯤 헤어졌을 때인가. 너를 되돌리기 위한 모든 방법을 생각해냈다. 내가 문제 자체였으므로 바뀌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상담치료 받기 시작한 것도 그 중 하나였다. 넉살좋게 살이 찐 상담사는 공허한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일 수 없고 네가 나일 수 없음이 괴롭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감정을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으면서 네가 알아주기를 바란다. 상담사는 그걸 강박적이라고 표현했다. 손을 자주 씻거나 가스불이 켜 있는지 의심하는 것만이 강박증이 아니라는 부연설명도 덧붙여. 나는 강박적으로 무엇을 지우거나 바로세우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네가 있을 때는 떠나지 않기를, 네가 떠난 뒤에는 돌아오기를 생각할 뿐이다. 그것만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들은 바로는 그가 블로그에 뭔가를 올리는 것 말고 이 관계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군요.

느긋한 어조로 상담사가 말했다. 나는 수긍한 뒤로 다음번 예약을 취소했으며 다시는 상담일정을 잡지 않았다.

오는 동안 워커를 벗어버렸다. 등산용 양말을 신어 괜찮을 줄 알았던 발에 하나둘 물집이 잡히기 시작한다. 나는 지난 한 달을 떠올린다. 그리고 삼 주 전, 너의 집 앞 공원으로 찾아갔던 일도. 내가 얼마나 미웠던지, 해질녘까지 너는 나타나지 않았다. 돌아가라는 답장만 간헐적으로 보내왔다. 목숨을 빌미로 협박하기 시작할 때서야 화난 얼굴을 드러냈다. 사랑니를 뽑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돌아가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뺨 한쪽으로 커다란 솜을 물어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돌아가라고 하고 돌아오라고 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너는 풀밭으로 솜을 투, 뱉고 입을 열었다. 그건 사랑이 아냐.

어떤 사물보다 강렬히 실재하는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니. 내 화를 돋우기 위한 말인 줄 알면서도 화가 났다. 너는 다시 고쳐 말했다. 너의 행동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 믿을 수 없으니 뺨을 세 번 쳐달라고 했다. 네가 그렇지 못할 사람이라는 것을 믿기에. 순식간에 눈앞이 번쩍였다. 세 번이었다. 네 결심이 그렇게 단호하다면 나에게 보여줘, 그럼 헤어져주지. 생각했던 확신이 무너졌다. 이어진 너의 말. 지금 너무 지쳤으니 각자의 시간을 보내자. 너도 하고 싶은 일을 해. 그렇게 건강해지면 다시 만나는 거야. 여느 때와는 다른 말과 또 다시 시작된 기다림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혼자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너를 생각했다. 돌아와서는 신문사에 취직도 했다. 나는 더 나은 모습으로 기다렸다. 모든 것을 반성했다. 그런데 너는 오지 않았다. 지금도 나를 등지고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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