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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엄 Jul 10. 2024

제목도 나도 없음

회의 내내 깨지고 나서 쓴 기록 들


오전 열한 시 사십일 분.


회의에 가고 있다. 지난 삼 주간 치열하게 맞서거나 아꼈던 프로젝트의 결과를 들을 수 있다. 벌써 넉 달째였다. 삼 주씩 일하고 남은 일주일은 회의 결과에 따라 낙담하거나 아주 조금씩 나아갔다. 넉 달이나 되었으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나는 회의에서 들을 말들이 두렵다.


두려워하면서도 매번 기대도 챙겨 나온다. 이번 회의야말로 다음 과정으로 나아가라는 결과를 듣지 않을까. 지난 삼 주를 헛되이 쓰지 않으려 애쓴 만큼은 듣기 좋은 결과를 기대와 맞바꿀 수 있지 않으려나. 지금도 일 호선 어느 역에서 회사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며, 틈틈이 내 옆에 선 기대를 본다. 집에 돌아올 때도 너와 함께였으면 좋겠다. 너랑 둘이 지난 삼 주간 수고했다면서 다음 과정도 함께하게 되어 기쁘다는 말을 주고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출근길에는 꼭 책 한 권을 챙긴다. 기대하는 마음이 너무 튀어나오지 않도록 일부러 잘 썼다는 평이 그득한 책 중 신중히 고르고 골라서 챙긴다. 잘 쓴 글을 읽으며 괜히 지난 삼 주간의 노력을 깎아내려 보고, 잘 쓴 글에 빠져들며 출근길인 걸 잊으려고도 해 본다. 그러나 결국에는 지금처럼 휴대전화 메모장을 켜고 만다. 미치겠다. 이 말만 열 번 적다가 황급히 5월에 남긴 메모를 켰다. 5월 중순쯤이었다. 그때 역시 지금처럼 이번 프로젝트에서 헤매느라 바빴고, 마찬가지로 간절했기에 부디 7월 중순쯤에는 다음 과정을 맞이했길 바란다는 편지를 적었었다. 7월 중순이 코앞인 지금. 그 편지를 읽으며 출근하고 있지만, 과연 퇴근 후에 5월의 나에게 어떤 내용으로 답장할는지.


아직도 쓰고 싶은 감정이 기대와 나란히 쌓였지만, 다 소진하고 나면 어제 완성한 장편소설보다 더 긴 글이 될 테므로 이쯤에서 책을 읽기로 하며, 이 말만 남겨 둬야겠다.


다녀오겠습니다.






오후 여섯 시 이 분.


회의가 끝났다. 내 기대도 끝났고 이제 집 가는 길을 함께할 친구는 좌절과 자기혐오쯤 되겠다. 열심히 했다. 제출하기 전까지 만족도 제법 했다. 그러나 결과 어디에도 내 노력이나 만족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또 다음 회의 일정이 잡혔지만, 도무지 다음 회의 때까지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종일 내 쓸모를 나에게라도 증명하고 싶었다. 넌 잘하고 있다는 말을 나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빈틈없이 무기력이 차고 들어왔다. 그러고 보면 어제 소설 마지막쯤에 이런 대사를 썼다. 나를 알아봐 줘. 어쩌면 소설을 가장한 본심 아니었을까. 아무나 나를 좀 알아봐 주길 바라는 본심. 그러나 정작 나도 날 알아볼 수 없다.


너무 문학적이야.


어제는 힘이 되었고 오늘은 나를 무너트리고 마는 말. 차라리 내게 문학적 재능이 진정 존재했다면 좋았을 텐데. 네 보고서는 너무 문학적이고, 아무도 네 보고서를 책처럼 사서 읽어 주지 않아. 네 보고서는 문학적이어선 안 돼. 차라리 내게 사서 읽을 만한, 그놈의 문학적 재능이 있었더라면 덜 무너졌을까. 너 글은 진짜 잘 써. 차라리, 진짜 차라리 내가 정말 글 잘 쓰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거야. 덜 좌절했을 거야.


지금 하는 일을 덜 사랑했더라면 덜 아팠을까. 퇴근한다며 그저 신났을까. 잘 모르겠다. 하나도 알 수 없다. 그저 어제 쓴 소설 마지막 대사나 읊조린다. 나를 알아봐 줘. 그러나 회의 때 들었던 말이 마지막 대사를 치고 들어온다. 너 지금 단독 예술 중인 건 아니잖아. 그렇다. 나는 예술이 아니라 일을 하는 사람이다. 지난 삼 주간 신나서 쓴 보고서를 가만히 읽었다. 부디 우리의 충고를 네 보고서가 실패작이라는 비난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했음에도 한 문장마다 실패라는 도장이 찍힌 것 같았다. 다 지우고 싶은데, 나 자체가 실패로만 깎여 나간 도장 같아서 내 손으로 지우는 게 맞나 싶다.






오후 열 시 오십 분.


울적할 때는 뭐든 다른 데를 보고 있어야 했다. 마침 전 회사에서 오늘 날짜로 보내 준 뮤지컬 티켓이 있었고, 내용조차 모른 채 무작정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가운데 공연이 시작됐다.


공연 내용은 뻔하다면 뻔했다. 그런데 그 뻔한 장면마다 집중이 됐다. 어쩌면 현실 도피일 수도 있겠다. 가짜 인생이라도 구경하며 내 인생을 친구 삼으려는 좌절과 자기혐오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청춘과 로맨스를 다루는 공연 중간마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특히 짜증 나고 슬픈 대사가 있었다.


완벽하지 않으면 안 돼.

그러면 넌 혼자가 돼.


고쳐야 한다는 걸 안다. 알면서도 고칠 수 없었다. 잘 해내지 않으면 혼자가 될 거라는 압박감.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앞으로도 영영 나를 알아봐 주지 않을 거라는 불안. 다들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고이다 못해 썩어 버렸다는 확신. 줄줄이 따라붙는 자기 연민. 마지막이 특히 문제였다. 나는 나를 불쌍히 여기기 싫은데, 그러려면 지금 하는 업무에 기필코 성과가 있어야만 했다. 아는데. 다 아는데 내 뜻대로 되질 않으니까 남들은 웃으며 보는 뮤지컬 앞에서도 우는 거다. 별 진상이 따로 없다.


그런 와중에도 하루 다 가기 전까지 브런치에 뭐라도 올리고 싶은 생각이 불쑥 치민다. 그 탓에 집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대뜸 이런 글이나 쓰고 앉았다. 언제쯤 웃으며 퇴근할 수 있을까. 울면서 퇴근하는 날이 지겨울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눈물샘은 마를 생각 없다. 눈물샘 대신 자존심만 상하고, 자존감만 메마른다. 그래도 저 뮤지컬에서 질리도록 들은 가사를 마음 한가운데에 둬 본다.


내일의 내가 저기 서 있을게. 얼른 와.


그래. 또 볼품없는 모습으로 내일의 나에게 가게 되었지만, 그래도 바통을 넘기러 갈게. 제발 또 다른 내일의 나에게는 덜 축축한 바통을 넘겨줘. 덜 축축한 덕분에 자주 놓치지 않아, 그나마 덜 망가진 바통을 이어받게 해 줘. 그리고 그땐 모든 내가 웃는 얼굴이게끔 오늘의 내가 많이 울어 둘게. 미안해. 바통은 더 축축해졌는데, 사랑은 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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