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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엄 Jul 12. 2024

하루 쉬고 하루 끝에서

여러분과 약속 하나 하고 싶습니다.


 

(1).

 

종일 자도 또 자고 싶었다. 그 탓에 눈 뜨고 감기를 몇 번 반복했더니 어제 하루가 통째로 사라졌고, 대뜸 오늘이 왔다. 그저께 속절없이 무너진 마음을 지금이라도 복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뜨자마자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무작정 달렸다. 열여섯 시간 가까이 잠들었다가 막 깨어난 몸은 달리기에 적합하지 않았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꾸역꾸역 달렸다. 달리다 보면 무너진 마음을 복구할 방법이 떠오를 것처럼 계속.

 

이어폰에서는 위대한 러너가 탄생했다는 말이 들렸다. 무작정 앞만 보며 달리다 보니 8주간 목표였던 30분 달리기에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도 더 달리고 싶었다. 호흡을 정리하기 위해 5분간 걸으라는 안내 따위는 무시하고 더 달렸다. 그렇게 삼십오 분 달릴 즈음이었나. 몸 곳곳에서 항복 선언을 보냈고, 끝내 합의점인 양 사십 분쯤 멈추어 섰다. 앞만 보고 뛰느라 몰랐는데, 어느덧 공원엔 사람이 넘쳤다. 방학이 시작된 걸까. 축구 시합을 준비하는 사람들. 축구 시합을 기다리며 아이스크림 먹는 사람들. 시합에 참여한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들. 나만 모르게 그들은 축구 시합을 앞두고 있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슬쩍 구경하고 갈까. 헐떡이는 숨 사이로 그런 고민이 불쑥 끼어들었지만, 관뒀다.

 

지금 당장은 무너진 마음을 복구해야만 한다.

그 생각에만 몰두하고 싶었다.

 





(2).

 

그러나 정작 뭘 해도 알 수 없었다. 무너진 마음을 복구하는 방법이 쉽게 떠올랐다면 세상 누가 고민하며 살까. 알면서도 뭐라도 계속했다. 밀린 책을 읽었다. 궁금했지만, 도전할 용기가 나질 않던 아이스크림도 시켜 먹었다. 문학적이라는 말이 상처로 남지 않도록 새로운 소설도 구상해 봤다. 그러다 택배도 뜯었다. 어제 도착했지만, 자느라 확인하지 못한 책이었다. 그 책은 서평단에 참가하며 받은 책인데, 정작 언제까지 서평을 제출해야 하는지조차 모를 만큼 잠만 잤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고는 뭘 했더라. 아. 밀린 책을 마저 읽으며 마음에 드는 구절마다 필사했다.

 

그러나 뭘 해도 마음은 나아지질 않았다.

 

이쯤에서 아예 더 다칠 작정으로 그저께 나를 무너트렸던 회의록을 켰다. 망설이지 않고, 쭉 읽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울음이 안 났다. 다 울다 못해 푹 자고 나서 읽은 덕분일까. 다들 맞는 말씀만 해 주셨음을 깨달았다. 회의실에 있던 모두의 말대로 내 보고서는 너무 문학적이었고, 읽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은 글이었다. 이때 타이밍 좋게 친구 D에게 전화가 왔다. 분명 처음에는 이런저런 일상 얘기로 떠들고 있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업무 얘기로 떠들고 있었다. 비단 나만 그런 나를 눈치챈 것이 아닌지 친구 D 역시 한참 웃다가 이런 말을 했다.

 

“거봐. 결국, 네 프로젝트는 네가 제일 사랑해. 네가 제일 사랑하니까 지금 이렇게 아픈 거지. 근데 난 이렇게도 본다. 너만 제일 사랑하면 안 돼. 다른 사람도 네 프로젝트를 사랑할 수 있게 네가 도와줘야지. 내 생각에는 말이야. 남들도 네 프로젝트를 사랑할 방법은 너만 알아. 넌 그 방법을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그때 나는 주차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당연히 내가 또 자기 연민에 시달리며 펑펑 울 줄 알았다. 그런데 회의록을 다시 읽었을 때처럼 이번에도 눈물이 나기는커녕 웃음이 막 났다.


반박할 수도, 하소연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내 프로젝트를 가장 사랑한다. 때로는 가짜 노동이라는 책을 읽으며 쿡쿡 찔려, ‘나는 가짜 노동자인가?’ 이런 생각에 휘말려도 또다시 이 일에 시간을 쓴다. 그러고도 더 쓸 시간이 없는지 둘러볼 정도로 사랑한다. 보고서가 너무 문학적이라는 말에 무너져도 정신 차리고 보면 또 그 프로젝트 얘기만 하고 있다. 정신없이 얘기한다는 건 그만큼 정신없이 사랑한다는 뜻도 되겠지. 그뿐인가. 언젠가 정말로 좋아했던 사람이 일 그만하고 자기 눈 좀 봐 달라고 했을 때도 난 노트북만 봤다. 울고불고하며 헤어진 이후로도 이 프로젝트와는 헤어지지 못하고 있다. 오랜만에 찾아온 사랑은 영영 놓쳐도 이 일만은 놓치기 싫다. 그렇게나 이 일을 사랑한다.

 

그런 내가 무너져 있어도 되나. 이 프로젝트를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인데. 서둘러 정신 차려서 다시 일해야 하지 않나.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 이 프로젝트를 사랑하도록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나 외에는 이 사랑을 퍼트릴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나 따위라도 애써야 하지 않을까.

 

종일 애써도 종내에 이르러선 다시 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돌아온다. 그제야 깨닫는 거다. 내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든 그 마음 한가운데에는 이 일이 있다. 나약한 줄 알았던 그 마음은 한가운데를 굳건히 지킬 힘을 가지고 있다.

 





(3).

 

그만 낙담하고 다시 일하기로 했다.

 

문학적이라는 말을 자주 듣고, 글빨로 사기 치지 말라는 말은 귀에 딱지 앉도록 듣는 나여도 이 일을 문학보다 좋아한 이상 어쩔 수 없다. 무너진 마음을 재건하는 방법은 무너진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4).

 

이번 글을 남김으로써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약속 하나를 내걸고 싶어졌다. ‘지금 제가 매진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육 년간의 결실로 마무리할 때까지 일 때문에 투정 부리지는 않겠습니다!’ 이런 약속.

 

물론, 이번 약속을 책임지는 사람은 나뿐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그저 내 약속을 잠시 훑고 지나가 주시기만 하면 된다. 잠시 훑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그 약속엔 엄청난 힘이 생긴다. (감사합니다!)

 


나는 태생이 우울한 사람이고, 태어났을 때부터 달고 나온 것인지 생각이 많아도 너무 많은 사람이다. 지금 하는 프로젝트를 매번 ‘마지막 발악’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내가, 나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데에 익숙한 내가 감히 약속해 보는 것이다. 기왕 이 일을 사랑하기로 한 이상 투정 없이 쭉 달려가 보겠다고. 그 끝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멈추기는 싫어졌다. 그러다 어떤 식으로도 결실 볼 즈음에 이 글에 허심탄회하게 답장하는 글을 써 보고도 싶어졌다. 그전까지는 투정 한번 없이 묵묵히 일해 보겠다는 약속으로 내 마음을 꽉 동여매 보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해치울 생각도 없으면서 하소연만 하는 사람. 지금 하는 일과 헤어질 생각이 없으면 지금 하는 일을 묵묵히 사랑해 줘야 한다는 걸 어제 하루 푹 잘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오늘 하루 끝에서야 깨달았다. 깨달았다면, 뭐라도 해야 직성 풀리는 사람답게 약속 하나 하고 싶어졌다. 이 일 때문에 무너져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작정이므로 투정은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하고.

 





(5).

 

덧붙여 과연 내가 정말로 문학적인 사람인지도 궁금해졌다. 확인 과정을 거쳐야만 호기심이 대충은 해결되므로 업무 보고서엔 담겨선 안 될 ‘그놈의 문학성’을 마구 표출해 보기로 했다.


일단 늘 그래 왔듯이 계속 내 하루 중 일부를 쪼개서 브런치에 기록할 테다. 그뿐인가. 두 번째 소설도 쓰려고 한다. 첫 번째 소설은 꼭꼭 감춰 뒀지만, 두 번째 소설은 완성할 즈음에 타이밍 맞는 공모전이 있으면 슬쩍 투척하려 한다. 이리저리 표출하다 보면 알겠지. 내가 문학적인 사람인지. 아니면 지금 하는 일에 적합한 사람인지.

 

사심은 후자이기를 바란다.

 

지금 하는 일을 매일 읽는 소설보다 더 사랑하니까. 일하다가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와다다 썼던 소설 속 주인공보다도 사랑하니까. 부디 이 사랑이 외사랑으로 끝나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러려면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려 줘야겠지. 육 년간의 짝사랑을 불평불만 없이 짠 하고 이뤄내고 싶어졌다. 이 프로젝트를 세상과 마주 서게 하고 싶어졌다. 그러려면 투정 부릴 시간에도 사랑하며, 일할 때 꾹 억눌러야 했던 ‘생각 많은 나’를 기록하러 브런치에 와야겠지.

 

그러려면 이런 말로 마무리해야겠다.

실은 내가 좋아하는 말이라서 굳이 쓰고 싶은 거지만.


내일도 또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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