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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호 Sep 07. 2023

새로운 계절을 들이는 법


아침저녁으로 서늘해진 공기는 여름의 끝을 알리고 있다. 낮의 햇살은 아직 여름이라 하지만 밤의 찬 기운은 이제 가을이라고, 작게 속삭이고 있다. 벌써 9월 하고도 여러 날이 지났으니 가을이 맞긴 맞다. 자세히 보면 가로수도 하나둘 노란 잎들로 물들기 시작하고, 어스름이 깔리는 시간엔 볕짚냄새가 짙어지고, 산책길에  굴러다니는 도토리 한 알에 가을이 담겨있다. 하나의 계절을 온전히 보냈으니 다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지난 주말, 여름의 무더위에 지쳐 거실이며 안방에 정리를 못하고 방치된 물건들을 보고 있으려니 명치에 뭔가 걸린 것 같고 머리도 아파왔다. 이럴 땐 모든 것을 멈추고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큰 아이가 학기가 시작되면서 기숙사로 떠났기에 큰 아이가 사용하던 작은 방을 내 방으로 당분간 사용하기로 했다. 우선 내 옷들을 작은 방 행거로 옮겼다. 남편과 행거를 같이 쓰다 보니 너무 비좁아 옷을 걸지 않고 침대 화장대나 빨래건조대에 올려놓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여기저기 널려있는 책들도 작은 방으로 옮겼다. 식탁에도 영양제와 전기포트, 티슈만 남겨놓고 영수증이며 공과금 납부안내서 등 잡다한 것들도 모두 작은 방으로 들여보냈다. 



이맘때면 친정엄마는 항상 집안의 가구 배치를 새로 했다.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어느 날은 농장의 자리가 바뀌어 있거나 서랍장이 거실로 나가 있는 등 계절이 바뀌면 가구 위치도 바뀌었다. 엄마가 체구가 작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자 혼자서 농장을 옮기고 서랍장을 옮기기엔 무리였을 것 같은데 엄마에겐 불가능은 없었다. 만약 혼자 들기 힘들면 오빠나 남동생이 도와드렸다. 나는 결혼하고 가구배치를 한 번도 바꾼 적이 없다. 엄두도 안 나거니와 그렇게 살림을 잘하지 못하기에 평생을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두고 쓰고 있다. 엄마처럼 좀 자리를 바꿔볼까 생각도 했지만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또 주말은 어찌도 그리 빨리 지나가는지... 


여자들은 한 번씩 쇼핑을 하면서 기분전환도 하고 집의 커튼이나 가구배치를 새롭게 해 집안 분위기를 바꾸기도 한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의 결혼생활도 순탄하지 못했다. 빠듯한 경제에 식당에서 일하기도 하고 오빠 선생님 아기를 봐주기고 하면서 없는 집 살림에 보탬이 되는 일은 마다하지 않았다. 생활력이 강한 엄마는 매일매일 열심히 일하셨다. 고단한 일상에 힘드신 날도 많았을 것이다. 힘들다고 주저앉아 있기보다 계절이 바뀌면 마음도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을 달래려 이리저리 가구를 옮겨보는 재미로 엄마 스스로 기분전환을 했던 것이다. 속상한 일이 있으면 이불빨래를 하고, 혹시 아빠랑 싸운 날이면 서랍장 정리도 하고 부엌살림도 정리하면서 타들어가는 마음을 정리했을 것이다. 내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리고 주말이면 늦잠은 잘 수 없었다. 엄마의 대청소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화분을 모두 마당에 내어놓고 물을 주신다. 화분이 놓여있던 현관을 빗자루로 쓸어내고 다시 화분을 깨끗이 닦아 들여놓으신다. 방마다 모든 이불을 털어 마당 빨랫줄에 널어놓거나 이불빨래를 하신다. 더러워진 운동화도 큰 대야에 담가 놓으면 눈을 비비며 일어나 장녀인 내가 일어나 운동화를 빨았다. 식구가 여섯 식구이니 한 켤레씩만 내놓아도 여섯 켤레다. 내가 운동화를 솔로 박박 문지르기 시작하면 엄마는 방마다 돌아다니면서 쓸고 닦으셨다. 그 쓸고 닦음이 끝나면 아침 준비를 하셨다. 주말이어도 아빠는 일을 나가시고 엄마와 네 아이가 한 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티비에서 나오는 만화영화를 보면서 감자 칼국수를 먹기도 하고 라면을 먹기도 했다. 





어릴 적 학교 안 가는 주말에도 일찍 일어나는 것이 억울했던 나는 아이를 주말 아침 일찍 깨우지 않는다. 간밤 독서실에서 늦게 들어온 것을 알기에 아이가 일어날 때까지 조용히 혼자서 책을 읽고 글 쓰고 그러다 산에도 다녀오고 사우나도 다녀온다. 그래도 안 일어나면 그제야 깨워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지난 주말에는 아이도 밥 생각이 없다고 해서 정리에 매진했다. 모든 잡동사니는 작은 방으로 몰아넣고 안방과 거실은 최대한 깨끗하게 만들어 놓았다. 작은 방으로 모아진 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버릴 것들을 분리해 냈다. 옷 정리를 하면서 서랍장에 아직도 있는 기모 바지를 보며 정신없게 살았구나 싶었다. 이것 말고도 구석에 있어 못 입었던 여름옷을 이제야 발견했다. 살림 실력 빵점이다 혼자 자책한다. 책장에서 버릴 책도 솎아내고 나눔 할 책도 따로 모아놓았다. 우리 집에서 책장이 제일 정리가 난감한 공간이다. 들어갈 곳은 없는데 책을 계속 늘어나니 말이다. 하지만 처치 곤란한 책장에서 5천 원짜리 문화상품권과 현금 12,000원을 발견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공돈이 생기니 기분은 좋았다. 문화상품권은 아이 책 사라고 주고 현금은 나중에 아이 치킨 먹고 싶다고 할 때 보태주어야겠다. 


한 계절을 보내고 또 한 계절을 들이면서 집안정리를 시작했다. 새로운 계절, 가을이 이번엔 더 아름답게 물들길 바라고 이제는 계절을 온전히 느끼며 살고자 한다. 집안이 정리된 만큼 마음의 정리도 되었다. 엉켜있던 마음들을 잘라낼 것은 잘라내고 풀어낼 것은 풀어냈다. 이제 가을을 들일 준비는 끝났다. 찬란한 봄, 뜨거운 여름 그리고 이제 충만한 계절, 내 인생의 가을이 시작되고 있다. 













© alisaanton,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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