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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호 Dec 15. 2023

손수의 즐거움 표고버섯냄비밥

어릴 적 겨울이면 어김없이 우리 집 앞마당에 고구마 간식이 포대로 도착했다. 쌀포대 비스무리하게 생긴 포대에 담겨서 말이다. 전라도의 따뜻한 남쪽 햇빛을 받고 자란 튼실한 고구마로 만든 고구마 말랭이다. 먹을 것 귀했던 시절인데다 더욱이 긴긴 겨울방학 동안 그것은 우리의 요긴한 간식이 되어주었다. 올망졸망 4남매는 겨울방학 내내 뛰어놀다가 허기지거나, 밤에 괜스레 배가 출출할 때면 방 한쪽 귀퉁이에 서있는 포대자루 속 고구마 말랭이를 하나씩 꺼내 먹으며 지냈다.


아득히 먼 남쪽 섬에서 강원도에 사는 손주들 주려고 하나하나 정성으로 말린 외할머니의 고구마 말랭이를 생각하자니 나도 이 겨울 무엇이든 정성 들여 말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양 시골장은 4일과 9일에 장이 선다. 마침 주말에 장날인지라 지인이랑 장구경을 갔다. 12월 초 때아닌 푸근한 날씨에 장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 사이사이 할머니들 좌판을 훑으며 똑떨어진 양파도 사고, 팥도 사고, 귤도 사고, 표고버섯도 사 왔다. 요즘 마트 물가뿐 아니라 오일장 물가도 많이 올랐다. 보통 한 바구니에 2천 원 내지 3천 원 하던 것들이 이제는 거의 5천 원이다. 제주 당근이랑 양파도 한 바구니에 5000원, 노란 감귤도 한 바구니 5000원이란다. 더욱이 생표고버섯은 만원을 받았다.


같이 간 지인은 지난 장에 표고버섯을 사서 말려서 요즘 볶아먹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말한다. 말린 표고버섯을 매일 한 줌씩 집어 볶아먹는다고. 그래서 나도 한 바구니 사 온 것이다. 버섯을  말릴 생각으로 냉장고에 넣지 않고 싱크대 위에 올려두었다. 하지만 저녁에 일이 생겨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그대로 두고 잠이 들었다. 이튿날 새벽에 눈 뜨자마자 버섯 생각이 퍼뜩 났다. 식구들 깰까 봐 조용히 거실에 앉아 표고버섯을 다듬었다. 처음에는 채를 썰었는데 사실 버섯은 통으로 말려서 피자모양으로 네등분해서 먹으면 더 쫄깃하고 맛있다. 그래서 좀 덜 이쁜 버섯들은 채 썰고 잘 생긴 놈들은 선별하여 밑동을 떼어내 통으로 말렸다. 밑동도 버리지 않고 된장찌개에 넣으려 잘게 손질해 따로 두었다.


손질된 버섯을 큰 쟁반 2개와 작은 쟁반 1개에 가지런히 널어놓았다. 말끔하고 이쁜 버섯들에게 어서 마르라고 주문을 걸어본다. 하필 요 며칠 날씨는 흐림의 연속이라 걱정이었지만 집안이 건조한 탓인지 잘 말랐다. 말린 지 5일째 되니 수분이 쫙 빠진 덕에 부피가 줄어들어 가득 찼던 쟁반에 빈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충분히 잘 마르고 있었다. 반으로 줄어든 버섯들을 쟁반 한 개에 합쳐 담았다. 그리고 아침식사 대용으로 먹고 있는 당근볶음에 말린 버섯 몇 개를 물에 살짝 불려 같이 볶아주었더니 맛이 좋았다. 사실 당근보다 쫄깃한 식감 때문인지 버섯에 더 손이 갔다. 


출근해서도 말린 표고버섯으로 하루 종일 뭘 할지 궁리했다. 우선 표고버섯 밥이 생각났다. 간장양념에 곱창김만 있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된장찌개와 심심한 계란탕에도 넣고 버섯장조림도 해볼까도 싶다.




이번주는 모임 송년회도 있었고 같이 일하는 분들과 회식이 있어서 두 번 다 고깃집에서 식사를 했다. 완벽한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사실 채식을 더 좋아하기에 밖에서 고기를 먹은 날은 한동안 고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오늘 저녁은 버섯 덕분에 온전한 채식으로 준비해 본다. 메뉴는 표고버섯밥, 일명 냄비밥으로.


잘 마른 버섯을 골라 잠시 불려두고 쌀을 씻는다. 보통 전기압력밥솥에 밥을 하는데 냄비밥을 해보기로 했다.  SNS 속 이쁜 솥밥 대신 오래된 냄비를 꺼내 밥을 짓는다. 아이들 어릴 적에는 굴밥이랑 콩나물밥도 자주 해 먹었는데 직장생활과 맞바꾼 집밥은 그동안 많이 빈약했다. 이제라도 잊었던 음식들을 차근차근 차려보려 한다. (사실 연재도 그런 의미에서 시작했다.)


쌀을 씻어 그 위에 표고버섯을 올리고 당근과 무 채 썬 것도 함께 올린다. 당근이 올라가니 색이 살아난다. 냄비에 불을 올리고 양념간장을 만든다. 간장에 통깨와 들기름만 넣고 양념간장을 만들어 둔다. 냄비가 끓어오르면 약불로 은근하게 밥을 한다. 냄비 안의 밥물이 잦아들기를 기다린다. 밥물이 거의 없어지면 뜸을 들인다. 익혀먹으려 베란다에 내어 놓은 김장김치도 한 포기를 꺼내와 썰어 놓는다. 맛을 보니 알맞게 익은 것 같다. 


김이 피어오르는 잘 지어진 표고버섯밥을 그릇에 담고 간장양념과 김치, 김을 곁들여 먹는다. 간장양념으로 밥을 비벼 우선 한입 맛을 본다. 당근은 푹 익어 부드럽고, 무는 당근보다 식감이 살아있다. 그리고 버섯은 고기처럼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난다. 다음에는 크게 한 숟갈을 떠 김치를 올려 먹기도 하고 김을 싸 먹기도 한다. 직접 말린 버섯으로 손수 냄비밥을 지어먹어보니 그 맛이 정겹다.


오늘부터 "손수"라는 말을 사랑하기로 했다. 남의 손이 아닌 내 손으로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품어주는 단어이다. 물론 단지 손으로만 만들어낼 수 없다. 나의 강직한 시간과 다정한 시선과, 그리고 살뜰한 정성을 온전히 받쳤다.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라 작은 것이라도 그 안의 펼쳐진 우주를 생각해 보게 된다. 벌써부터 다음엔 무엇을 말릴지 고민에 빠진다.



대문사진 © purebonebroth,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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