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슬로우푸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한차례 눈을 맞이하면서 마음속으로 품고 있던 음식이 떠올렸다.
'올해는 동지에 꼭 팥죽을 만들어 먹어야지.'
하지만 정작 동짓날에는 감기약 먹고 일찍 잠들어 다음날 팥죽을 만들게 되었다. 흰 죽이나 전복죽은 가끔 쑤어봤지만 팥죽은 생애 처음이다. 어릴 적 엄마는 겨울이면 팥죽 대신 팥칼국수를 자주 해주셨고 결혼해서는 시어머님께서 다니시는 보살집에서 매해 얻어다 주셔서 먹었다. 올해는 왠지 직접 쑤어보고 싶었다. 사실 팥죽은 어렵다기보다 여러 번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번거로워 선뜻 만들기에 망설여지게 된다. 순식간 뚝딱 만들어지는 패스트푸드가 아니라 시간과 함께 정성도 곁들여야 하는 슬로우푸드이기에.
우선 시작 전에 팥죽을 만드는 법을 검색을 했다. 팥을 삶기 위해 압력밥솥을 사용하기도 하고 물에 삶는 방법도 있었다. 내가 택한 방법은 전기밥솥을 이용하는 것이다. (전기밥솥 생각보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강추!) 미리 장에서 사다 놓은 붉은팥을 물에 씻으면서 쭉정이들을 골라내었다. 팥은 삶아서 첫물을 버리는 것이 좋다고 해서 냄비에 팥을 3분 정도 삶아 첫물을 따라버리고 전기밥솥에 안쳤다. 물은 팥의 4배를 부어야 한단다. 잡곡에, 고화력으로 선택해 취사를 누르고 거실에서 요즘 빠져있는 드라마를 보며 기다렸다. 말을 안 해도 이렇게 멋있을 수 있는 것인가, 나이 들어서 주름이 더 멋진 배우 정우성을 푹 빠져 보고 있다 보니 전기밥솥이 "맛있는 밥이 만들어졌습니다" 소리를 내어 얼른 주방으로 가보았다.
유튜브에서 본 대로 삶아진 팥을 손으로 눌러보니 잘 뭉개진다. 푹 삶아진 팥을 몽땅 체에 붓고 주걱으로 살살 으깨었다. 그리고 물을 조금씩 부어가면서 팥물을 내렸다. 핸드블랜더로 갈면 쉽게 된다고 하는데 그래도 손맛이 가미된 방법이 좋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고 휴일 아침의 여유롭고 넉넉한 마음을 장착한지라 체에 내리는 방법으로 해보았다. 어느 정도 팥물이 내려가면 손으로 팥을 주물주물하면서 걸러냈다. 찌거지가 다 걸러지면 냄비에 팥물을 옮겨 담고 하이라이트 불을 켰다.
팥죽에 쌀을 불려 넣어야 하지만 어제저녁에 해둔 밥이 있어 밥을 한 공기 되게 해서 팥죽에 같이 넣었다. 생전 처음 시도하는 팥죽이라 만들어보는 것에 의의를 두려 한다. 그러기에 새알심 넣는 것도 언감생심이다. 나는 새알심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데다 여기서 더 번거로워지면 팥죽이 제대로 완성되지 못할까 봐 살짝 몸을 사렸다.
은근한 불에 나무주걱으로 살살 저어 팥죽을 쑤었다. 번거로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휴일 오전 강태공 같은 마음으로 한가하게 주걱을 젓고 있자니 이것 또한 작은 행복이구나, 싶었다. 아직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완성된 팥죽은 어떨지 설레기까지 했다. 평소 팥을 유난히 좋아해서 아이스크림도 팥이 들어간 비비빅이나 붕어 싸만코를 먹고 팥빙수도 할머니같이 팥이 들어가야 빙수같이 느껴진다. 호빵도 팥 들어간 것만 먹고, 붕어빵도 역시 팥붕어빵만 사랑한다. 생각해 보니 내가 팥을 정말 좋아하는데 아직까지 팥죽을 만들어 보지 않았다니 반성의 시간도 가진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팥죽에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하고 마침 일어난 작은 아이에게 천천히 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곤 동치미와 김치를 꺼내었다. 지인 추천으로 맛집에서 주문한 동치미는 약간 싱거워 그 맛이 밋밋해서 동치미 무와 백김치를 썰어 고춧가루와 들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무쳤다. 팥죽이 다 되자 큰 아이도 일어나 아침을 차렸다. 아침 일찍 출근한 남편의 팥죽은 따로 남겨 놓고 각자 취향껏 소금이나 설탕으로 간을 하라고 내어주고 팥죽 맛을 봤다. 음, 달지 않게 딱 적당하게 잘 되었다. 보통 식당에 가서 팥칼국수를 주문하면 소금과 설탕파로 나뉘게 된다. 나는 소금, 남편은 설탕을 선택하는데 설탕을 넣어 먹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너무 달아서 무슨 맛으로 먹나 싶다.
아이들은 팥죽을 싫어할 것 같았지만 큰 아이도 작은 아이도 맛있게 먹어주었다. 아이들은 치킨이나 고기반찬 등 뭔가 잘 차려진 음식만 선호하는 줄 알았는데 단출한 팥죽도 좋다고 하니 내년에는 새알심도 굴려서 함께 넣어줘야겠다.
팥죽을 만드는 시간은 대략 넉넉잡아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팥을 씻으면서 쭉정이 골라내는 시간 5분
전기밥솥에 팥을 익히는 시간 45분
팥물을 체에 거르는 시간 10분
팥죽을 은근하게 끓이는 시간 15분~20분
한 가지 음식을 1시간 30분이라는 온전한 시간을 들여 완성했다. 느긋하게 완전히 한 가지 재료에 몰입하는 것이 좋았다. 지금 내 나이는 아마도 팥물을 체에 거르는 시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동안 열심히 익히는 삶을 살아왔다.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 무언가 해내기 위해 송두리째 나 자신을 받쳤다. 이제는 껍질을 체에 거르고 진정한 나만을 남겨놓아야 하는 시간이 아닐까. 남은 동안 은근하게 푹 끓여지고 나면 설익은 나의 인생도 따뜻한 무언가로 완성될 것만 같다.
주말 아침 한가하게 팥죽을 쑬 수 있는 여유가 감사하다.
남은 팥으로 팥칼국수도 도전할 용기도 생겼다.
나이 오십에도 용기가 남아있다니 이 또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