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플랜
한라산 당일 쏠로-8 영실 원점회귀
'영실-윗세오름-백록담 남벽-윗세오름-영실' 등반 코스는 아름답고 씩씩하고 지루하지 않은 탐방로로 산을 조금 자신있게 타는 초보들에게 추천하곤 한다.
오늘 나의 플랜 비는 나를 죽일 뻔 했다. 비 오는 날 5시간 이상 등반은 무리다.
지난번처럼 관음사 원점회귀로 백록담 탐방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예약에 성공해 두었었다. 가장 젊을 때 가장 어려운 코스를 최대한 해보는거야. 모험이며 독한 의지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다.
비가 오는 관음사 탐방로는 지옥일 것이다. 새벽 2시에 취소하고 빠릿빠릿 렌트 예약을 했다. 하지만 영실 남벽 코스를 만만하게 보고 오늘 큰 코 다쳤다.
영실을 오른지 30분 지나며 비가 온다. 바람불고 추우면 눈으로 변한다. 영실의 숲에서는 바람이 찬 줄 몰랐다. 나무들이 보호해주었나보다.
윗세오름 11시, 뭐라도 먹어야 하는데 아침도 안먹은 빈속에 남벽을 빨리 보고 싶어 강행군했다. 비가 세차졌다. 눈이 물을 먹으며 발을 무겁게 잡는다. 돌아오는 길, 젖은 눈위에 눕고만 싶다. 저기 누워 와인 한잔 하면 좋겠다, 미친 생각을 한다.
윗세오름에서 과일도시락을 먹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옷도, 장갑도, 신발도 다 젖어버려 난감했다. 짐이라곤 딸랑 바람막이, 물 두병이라 차에 두고온 장갑이랑 여벌 옷들이 너무 아쉬웠다.
거기서부터 영실 숲에 다다르기까지 손이 너무 시렵고 이가 덜덜 떨렸다. 비가 더 세차지고 있었다. 눈길은 쵸코 슬러시가 되어 신발에 첩첩 달라붙는다. 무겁다.
손 끝을 계속 등산 스틱에 두드리며 열을 내면서 최대한 빨리 걸었다. 더러운 길에서 동사 겸 객사로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 다녔던 한라산 시간당 속도 기록을 깼다. 극단으로 몰리면 초인적인 힘이 생기나 보다.
따뜻한 샤워를 하고 해물전복탕을 먹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며 이 후기를 쓴다.
가장 잘한 건, 백록담 남벽, 안개속 어른거리는 실루엣을 보며 친구를 위한 진심의 기도는 했다는 거다.
살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