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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Aug 13. 2024

남벽 가는 길 5

[단편소설] 5-5

어떤 사람에게는 특별한 통증이 있다. 그 통증은 때로 영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특이한 능력을 가지라는 유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도깨비불 같이 서슬 퍼런 두 개의 직각 칼날에 맨발로 올라서던 엄마는 공포에 질려 올려다보며 울던 어린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반대 편에서 어서 오르라는 사나운 눈길의 할머니를 무시하고 내려왔다.


어렴풋하지만 격렬한 이런저런 광경이 퍼즐처럼 기억 속에 흩어져 있었다.


엄마는 시름시름 아픈 몸을 견디며 나를 구하기로 한 것 같았다. 그들의 신은 엄마를 통해 내게까지 오기로 한 모양이었다.


엄마의 거부로 나 또한 앓게 될 테지만 그 대신 내가 택한 한 사람에게 생명을 건넬 수 있다 했다. 그게 더 가치 있는 삶일 거라고 엄마가 그랬다. 엄마가 도와주겠노라고.


몸 안에 든 영의 힘을 빌어 쨍쨍한 육신이 되어 남의 미래를 들여다봐주는 삶 대신에, 스스로 굳건하게 사랑하며 독립적인 인생을 살라는 거였다. 통증을 견딜 만큼 빛을 주는 사람을 만나라 했던 엄마의 유언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를 보는 기쁨은 내게 빛이 되고도 남았다. 남벽을 다녀온 후 나는 조금씩 이상한 현기증에 시달리며 천천히 걸어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그의 미소를 보면 다시 기력이 회복되는 것 같았다. 이런 거구나, 빛으로 통증을 견딘다는 것이.


그의 몸에서 벌어지는 축복 같은 향연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나날이 빛이 되는 마음이 그의 몸을 더 기운 나게 하는 것 같았다.


그 기쁜 와중에 쇠락해지는 나의 몸과 마음을 따라 이상한 집착이 도지고 있었다. 그를 오래 지켜보고 싶었다. 파이팅도 외치며 마주 보고 웃고 싶고, 신나게 드라이브도 하고 싶었다. 달릴 수 있는 끝에서 같이 날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은 직감한다. 오래 같이 할 수 없는 인연을 말이다. 내가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할수록 신이든 어떤 영혼이든 그 질투에, 누군가는 눈이 멀 것이다. 그게 그가 아닌 내가 되길 바랐다.


그가 행복하면 좋겠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 잦아 들어가는 에너지, 나는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적었다. 어느 새벽 나는 정말 공포였다. 그를 보고 싶다는 집착에 공황이었다.


오늘의 주제는 Fear, 공포다. 오래 같이 있을 수 없는 그에 대한 간절함이었다.


I wake up to a fear that resides deep within my heart.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공포로 아침을 깬다


At times, I question my existence, wondering if I am truly myself in reality. 때로 내 존재가 의심스럽다, 정말 현실에서 진실한 나로 사는 것일까


Occasionally, it feels as though I'm living in a dream of another world, where a stranger dreams of the things he desires. 마치 다른 세상, 어떤 낯선 사람이 열망하는 것들을 꿈꾸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If I were a mere figure within his dream, I could be controlled by his will. 그의 꿈속 한 인물이라면 나는 그의 의지대로 되는 수 밖에는 없을 거다


Is the thought I'm typing in this space real or merely an illusion? 이 공간에서 타이핑하는 나의 생각은 정말일까 환상일까


The fear of whether I truly live in the real world or not, makes it difficult for me to breathe. 이 현실에 내가 정말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공포로 숨쉬기가 힘들다


Was the conversation I had with him the other night just a dream from another man's dimension? 내가 언젠가 그와 나누었던 대화는 다른 차원의 사람이 꾼 단순한 꿈이었을까


Was the affection I poured into his soul all in vain? 내가 그의 영혼에 쏟았던 그 애정은 모든 게 헛되었던 걸까


영어로 끄적거리는 마지막 시간이다. 내 마음을 꺼내보는 뜨거운 시간이다. 오늘은 11월 9일, 여전히 둘이 한 방향을 보고 있다고 믿는다.


7월의 마주침과 기다림, 그리고 11월 5일, 6일, 7일, 8일 그리고 오늘, 이제 하나씩, 나와 마주했던 것들과 작별하고 있다. 전동차 출입구 앞 7-3번을 꼭 기억할 거다. 그가 술 취해 기댔던 그 벽을 눈에 넣고, 그가 걸어오던 길을 새겨둘 것이다.


그가 온다. 지금 그가 7-3 승강장을 향해 웃으며 걸어오고 있다.


제가 그리울 땐 남벽을 생각하세요.


어디 가세요?


여행을 하려고 해요. 꽤 오래 하게 될 것 같아요.


네, 기다릴게요.


그래요, 제가 많이 생각날 땐 남벽으로 오세요.




끝까지 차는 숨을 달래며 천천히 남벽으로 갔다. 차가워진 날씨에 하얗게 흩뿌려지는 눈이 아름답다. 남벽이 뻗어 내려간 구릉을 건너 눈이 쌓여 얕게 보이는 계곡을 밟는다. 아름다운 곳이다.


솜사탕처럼 가볍게 날아오를 것 같다. 어느새 둥실 자유롭게 푹신한 구름을 따라 남벽의 이랑을 총총 달음박질한다. 나는 남벽 위 바위가 늠름한 그 비탈에서 다리를 꼬고 흔들흔들 앉아서 콧노래를 부르며 그를 기다린다.


11월의 남벽에 눈이 내린다. 가끔 달려 내려가 바다를 건너 그를 바라보다 오는 날은, 내가 다녀온 시간에 영원을 담아 꽁꽁 밀봉해서 바위 사이에 올려 둔다.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 또한 내 이름도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세상의 표식이 없는 우리들은 존재 만으로 서로를 기억하리라.


그가 오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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