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다가올지도 모를 현실을 갑자기 눈앞에 가져다 대는 통에, 마치 끓는 기름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과 마음이 쓰라렸다.
'응, 그래요. 고마워요.'
20대 중반이었다. 직업은 무조건 영어를 쓰는 곳으로 선택할 거야라는 당찬 목표와는 달리 여러 무역회사에 원서를 냈다가 번번이 떨어졌다. 결혼한 사람은 받지 않는단다. 쿵! 충격에 공무원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태어난 지 1년 된 아이를 시어머님께서 데려가시며, '대학까지 나왔으니 네가 하고 싶은 걸 해야지. 아이는 내가 얼마간 봐주마.' 하셨기에 독서실을 얻어 삼사 개월쯤 독하게 공부했다. 그러다 사달이 났다.
독서실 불빛이 갑자기 흐리더니 왼쪽 눈이 찢어지듯 아팠다. 으우욱..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다 멈추고 글자가 보이길래 그냥 공부를 했다. 그 이후 눈안쪽에 뭔가 둥둥 떠다니며 매일 다른 추상화가 나타났다. 한쪽의 그림이 다른 쪽으로 퍼진듯해서 안과에 갔더니 비문증이란다. 근시에 무리한 눈 사용 때문인데 치료법은 없다고.
그때 안과에 꾸준히 다닐 걸, 이젠 후회보다 더 열심히 보며 살 생각을 해야 한다. 얼마 후 갑자기 현기증이 나면서 왼쪽 눈에 검정 기둥이 어른 거렸다. 전체가 보이지 않으니 가슴이 철렁하여 유명하다는 영등포 K안과에 갔다. 망막박리 초기라며 눈 안을 레이저로 뒤지고 눈물 흘리다 약을 받아 돌아왔다. 검정 기둥이 없어지자 불안도 없어졌다. 그때부터 더 철저하게 눈을 보살폈어야 했는데 젊은 나이에 그걸 몰랐다.
감기라도 걸려 열이 오르기만 하면 눈이 흐렸다. 감기라서 그러려니. 두통이 나고 눈이 뜨거워 괴로워도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러려니. 젊은데 뭐를 걱정하니 그랬다.
운전하다가 왼쪽 눈이 깜깜해진 경험은 나를 극도의 불안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시신경이 약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먹을 것과 자는 것을 조절하며 더 나빠지지 않도록 하는 게 최선이라 했다. 눈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본다. 정기적으로 시신경 검사를 하고 있다.
좋은 안과의 평생 주치의도 만나 근시 교정 수술도 했다. 의술은 더 좋아지고 있으니 그냥 믿고 따라간다. 불안할 때마다 불을 끈 깜깜한 안방 화장실에서 더듬거리며 익숙함을 학습한다. 보험도 들었다. 무슨 소용이람 하면서도 작게 의지가 된다. 남편이 무덤 하게 그냥 받아들이는 거 같아 마음이 더 아프다.
젊음과 일에 빠져 눈을 돌보지 않은 게 속상하지만 그냥 최선을 다해 살면 된다.
내 눈이 희미해져 가는 충격보다 더 가슴을 찢는 통증은 다른 곳에서 왔다. 아이의 눈이 가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편두통이 오면 앞이 보이지 않아 거리를 더듬으며 집으로 오는 아이, MRI니 뭐니 검사를 해도 뇌도 눈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소리를 죽여 혼자 통곡하는 일이 잦아졌지만 엄마인 나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내가 볼 수 있는 한 따뜻하게 바라봐주고 말해주고 안아주는 일이 전부다. 말해주고 안아주는 건 나중에도 할 수 있으니 딸아이가 자라는 모습, 하고 있는 것들을 구석구석 보고 느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아이는 7년째 발레를 하고 있다. 취미로 하지만 진심을 가득 담아서 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 공포를 딸아이와 나는 알고 있다. 지금 보일 때 열심히 보고 느끼며 충실하게 살자고 둘이 다짐했다.
지난 7월 용산 아트홀 공연도 하고, 곧 국립극장에서 아마추어 공연으로 무대에 선다. 저 12명의 공기요정 중 가장 키 큰 아이가 내 아이다.
나는 곧 있을 딸 아이의 발레 공연에서 최대한 앞 좌석에 앉아 내 아이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고 싶다.
한 줄 요약을 하자면, 젊을 때 몸과 마음을 돌보라는 것과 혹여 아픈 곳이 생기면 자신을 믿고 의술을 믿고 긍정적으로 하루씩 잘 살아가면 된다는 거다.
아침에 일어나니 오늘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난 어제보다 더 열심히 보며 살 거다. 뜨겁게 살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