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 입을 삐죽거리며 미주가 한 마디 했다.
"넌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냐?"
"내 시간에 튀어 들어오는 불한당 패거리 같은 인간들이 싫어!"
"너도 한 패 같은데? 크흐흐. 그 대범한 몰상식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아, 참 근데 너 독서토론 동아리 들 생각 없냐? 다음 책이 갤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라더라."
"뭐? 불확실성의 시대?"
"응, 불확실성, 진리의 희석이나 모호함, 본질적인 혼란이 어쩌고 저쩌고 네가 맨날 말했었잖아. 혼자 싸매고 있지 말고 같이 토론하면 뭔가 좀 보이지 않을까 해서."
"같이 얘기한다고 해결이 되니? 본질은 자기 스스로 뒤져서 푸는 거야. 모여 떠들며 대강 일반화시켜서 문제를 푸는 척하는 시간으로 나를 허비하긴 싫어. 너나 하든지."
도서관에 들어가 짐을 싸서 쓸쓸히 나왔다. 법을 다룰 인간이 그렇게까지 튀어 올라 분노했어야 했나. 나도 그렇지. 그렇게까지 독하게 메시지를 패대기 칠 일이었나. 아, 정말 나란 인간… 희서는 참았어야 할 순간에 대해 결국 자신을 질책하고야 말았다.
소설이나 자기 계발서에 몰두하는 토론 동아리인 줄 알았는데, 안타깝게 저평가된 죽은 경제학자의 책을 읽는다고 하니 혼자만 골몰하던 지루함과 외로움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읽는다는 거지? 한쪽이 구겨지면 다른 한쪽이 탄력을 받는 거야. 어깨에 멘 무거운 가방을 다른 쪽으로 돌려메며 학생 회관으로 향했다.
일층 복도는 어두웠다. 다 닳아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문을 몇 개 지나자 독서 토론 동아리의 팻말이 박힌 파란색 빛바랜 문이 눈에 들어왔다.
독서 토론 동아리
<시지프>
뭐야, 시지프? 미주로부터 들어왔던 토론 모임의 여러 주제나 활동이랑은 너무 이질감이 드는 이름이라 풋 웃음이 나왔다. 신을 속인 벌로 죽은 후 바위를 뾰족한 산꼭대기로 올리는 벌을 받은 시지프, 꼭대기에 머물 수 없는 바위가 다시 굴러 내려가면 그 바위를 힘겹게 다시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 하필 신에게 벌 받는 죽은 왕의 이름이라니 뭔가 이야깃거리가 있을 것 같았다.
유일하게 자살을 철학적 문제로 삼았던 까뮈가 떠올랐다. 모든 형이상학을 비웃으며 인간을 자살까지 몰고갈 수 있는 철학과 관념, 부조리한 운명을 받아들이며 기꺼이 바위와의 일체감을 운명으로 여기며 능동적으로 목표를 이루는 강하고 행복한 시지프, 희서는 어쩌면 불확실의 안개가 천천히 걷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주가 전했던 뉴스거리와는 다르게 훨씬 더 묵직한 보이지 않는 겹겹의 이면이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갈브레이스를 한대서..."
"불안과 불확실은 걷히지 않아요.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죽는 그 순간에나 걷히지 않을까요? 아니, 걷히는 것도 아니지.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일 테죠. 생명의 시간이 끝나는 바로 그때 말이에요."
가입할 건지 묻지도 않고 벌써 토론이 진행된 것 같은 바쁜 입을 바라보며 내 시간이 쓸데없이 허비되지는 않을 거란 막연한 기대를 했다.
"준하. 저는 이준하입니다. 동아리 회장. 3학년이요."
"3학년 신희서예요."
"우리 동아리는 존댓말이 원칙이에요."
물어보지도 않은 규칙부터 꺼내는 건 같은 3학년이란 걸 알고 내가 벌컥 말을 놓자고 할까 봐 그런 것 같았다. 희서도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반말이나 언니, 오빠 같은 친족 호칭 따위 이면에는 폭력적 서열, 비열함이나 비굴함이 버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준하와 희서의 관계는 존댓말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