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잘 될 거야.”
“뭐가 어떻게 되어야 다 잘되는 거지?”
동후가 한 마디 하면 희서가 어떠한 반응을 하든 끝이 매캐하게 꼬인다. 동후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의 깊은 속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너무 열을 퍼부으며 죽을 듯 사랑해 주니 답답하고 지친다고나 할까. 왜 이렇게 다 해주는 거야.
동후의 눈은 오래 마주 볼 수가 없다. 마치 희서에게 Desperado를 불러주며 하염없이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그건 희서가 그녀 자신에게 불러주던 그녀의 노래였다.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불러주는 게 아니고.
[Let somebody love you]
[누군가 널 사랑하게 해 줘]
사실은 희서가 동후에게 자꾸 더 말해보라고 다그치는 것 같았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정말 궁금해. 희서는 그렇게 동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 때 동후는 조용했다. 초등학교 때 전교 회장이 사춘기를 거치며 과묵 해진 건가. 독서 토론은 진지했고 동후는 언제나 더 진지했다. 별 말이 없다가 토론이 끝날 때쯤 준하가 거의 항상 동후에게 시선을 주면 전체를 정리하며 자신의 견해를 조근조근 힘을 주며 얘기하곤 했었다.
“시대는 항상 미래에 대해 예견하고 싶어 하지만 누구도 알 수 없는 불규칙한 변화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미리 무언가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갤브레이스는 기본 적인 호혜 평등과 균형을 이루며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를 이끌어 가는 원리가 굳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변화 예측의 불가능함을 시스템으로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풍요로운 현대 사회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모순, 이런 시대에 우리가 옳다고 믿는 합리적인 사회 구조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죠. 사회 체제의 도움 없이 시장에만 맡기는 경제 체제가 과연 안전한 것일까요?”
희서가 동후의 깊이를 알 수 없어 더 귀 기울이며 그를 알고 싶었던 동아리 시절이었다. 그렇게도 알고 싶었고 좋은 사람이었던 동후가 희서 옆에 지금 있는 것이다.
동후가 눈물을 그렁이며 희서를 잡았던, 그 오 년 전의 시작을 희서는 거절했어야 했던 걸까. 그때로 다시 돌아간대도 희서는 똑같을 텐데, 같이 했던 약속은 변하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에 답답하기만 하다.
준하 때문에 꼬인 삶이었다. 준하는 왜 지금 돌아온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