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건 어떤 한계도 규정도 필요 없다.
플라톤의 <향연>은 육체적인 사랑부터 아름다운 가치 자체를 사랑하는 초월의 경지까지 다루는 에로스의 전 스펙트럼을 돌아보며 토론을 뜨겁게 달구었다.
상대에게 인정받으려는 투쟁적인 사랑도 사랑이고, 육체적인 쾌락만 추구하지 않고 정신적인 성장으로 이끌어가는 사랑 또한 아름다운 것이다. 서로 단점들을 보충하며 균형을 이루어가려는 사랑 또한 존중받아야 하며, 불완전한 존재로서 나머지 반쪽을 찾으려는 열정 또한 사랑인 것이다. 살아가며 발견하게 되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감정과 존재 가치,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을 인정하고 존재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은 욕망도 사랑이다.
남성만의 서열적 동성애가 허락되던 고대 그리스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어찌 보면 편협한 에로스 이론 같은 플라톤의 <향연>이 토론서로는 유감스럽다는 의견도 꽤 있었지만 결국 시대적으로 옳은 것들은 계속 하나의 철학으로 남는 것이지 않는가.
동후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준하는 그 어떤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두통이 났다고 했었던가.
"눈에 보이는 대상에 대한 욕망과 보이지 않는 가치 추구에 대한 갈망은 온도가 다른 건가?"
토론이 끝나고 꽤 오랜 기간이 지나서야 준하는 뜬금없이 동후에게 질문을 던졌다. 몇 개월도 전에 했던 주제를 지금까지 품고 고뇌하고 있었던 건가. 동후와 준하는 에로스의 양쪽 끝에 서서 두 극단의 아름다움이 같은지 다른지에 대해 서로에게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좌석이 몇 개 없는 작고 낮은 카페는 벌레가 지나다녀도 모를 정도로 어두웠지만 준하의 질문은 고뇌하는 뇌를 환하게 밝히기에 충분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출산에서 이어지는 영원한 에로스는 결국 보이는 대상에서 이어지는 거잖아. 그렇지?"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동성이건 이성이건 이미 세속적인 욕망을 다 건너온 사람일 수도 있겠지. 경험하지도 않은 것이 최고 가치로 이어지는 원전이 되는 건 불가능할 테니 말이야."
"어떤 욕망에 사로 잡히면 그게 삶 전체가 돼. 삶 전체가 흥분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해서 그게 가장 최고 가치라고 믿게 되거든. 정말 존재론적인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추구하는 게 가능한지 잘 모르겠어."
“그 사람 존재 자체가 주는 빛 같은 거 아닐까? 만지지 않아도 소유하지 않아도 그 자체가 발광하면 내가 살아가는 힘이 되는 거지. 그냥 있어도 좋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기쁜, 뭐 그런 거 아닐까? 남녀라는 성과는 상관없이 말이야”
"자꾸 그 애를 가로막고 못 가게 하고 싶어 미치겠어." 준하가 대화를 끝내듯이 말했다.
동후는 더 물어보지 않았다. 준하는 동후의 에로스 저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