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이대로 좋아."
동후는 무심히 가방을 쌌다. 가방 정리처럼 깔끔하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건 없다. 동후가 밖을 향해 처음 꺼낸 소리였다. 준하를 향해 무심한 척 날리는 진심이 아팠다.
"그냥 이대로 좋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네가 부럽다."
동후는 속으로 놀라며 준하를 듣고 있었다. 너도 알고 있었구나. 나를, 그리고 또 너를. 동후의 표정과 몸짓이 묵언수행을 하는 것 같았다 해도 예민한 준하가 못 느꼈을 리 없었다. 가끔은 허전함을 흘렸을 테고 허무함에 떨었을 테고 쏟아지는 감정에 걷잡을 수 없는 흔들림을 동후로부터 고스란히 느꼈을 준하였다.
"우린 많이 다르다는 거 알아. 하지만 하나 정도는 그냥 두면 어때서. 시간 말이야.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끌려왔던 그 시간들을 말이야"
"그래, 우리에게 사실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너나 나나 곧 군대도 갈 거고."
"사회적인 규율에 따라 산다는 게 너무 힘들다. 한 사람으로 온전히 이해받고 산다는 게 불가능한 건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 말이야. 왜 항상 고정된 시선 속에서만 움직여야 하는 거지?"
동후는 대학생, 남학생, 신입생, 동창, 동기, 남자, 그런 거 말고 그냥 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했다. 한 사람이 지닌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삶이 그렇게도 어려운 건가 매번 고민하고 부딪히며 점점 더 과묵해져 갔다. 동후에게 준하는 바라보고 있는 것 만으로 세상 그 자체였다.
준하가 만든 독서토론 동아리, '시지프'만 해도 그랬다. 밝게만 보이는 준하는 왜 헤어 나올 수 없는 벌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하는 반복되는 괴로움을 택했을까.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뒤로 물러서 경계해야만 하는 그 반복되는 관계의 공포를 어떻게든 견디고 싶었던 건 아닐까. 동후는 시지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동아리 회원들 앞에서의 큰 손짓과 몸짓, 호탕한 듯 웃는 준하의 모습은 책으로 시선을 떨굴 때나 창밖으로 고개를 돌릴 때 긴장과 허무로 텅 비어 가는 눈으로 변한다는 것을 동후는 감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약한데 강하게 보여야 하는 준하, 강하게만 보이고 싶은 그런 준하의 약점들이 동후에게는 너무나 인간적으로 보였다.
특히 준하에게 뼈아픈 독설을 가끔 퍼붓는 신희서 앞에서 준하는 더 크게 몸짓을 과장하고 있었다. 그 또한 동후는 가슴이 아팠다. 이전에 토론했던 플라톤의 <향연>으로부터 온 갖가지 에로스의 색깔이 동후 머릿속으로 울렁거리며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