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 같은 감정의 폭풍을 견디며 살았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면서 라는 노래 가사에, 받는 게 아니고 어떻게 주기만 하니 반항하며, 머리는 알고 있다 끄덕여도 마음은 불안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시간이 많았다.
아무리 사랑이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 말이 많아도 희서 앞에 다가와버린 사람에게 그런 완벽한 이론 같은 사랑이 가능한 건지 그녀는 정말 불안하기만 했다. 왜 눈으로 보려고만 하는지 왜 손이라도 잡고 있어야 짧은 시간이나마 안심하는지 그런 속절없는 불안이 있었다. 희서는 그런 것들을 자신의 안에만 가둬두고 겉으로는 아주 평화롭게 보내고 있었다.
준하의 시간이 희서의 시간과 맞지 않을 때는 논문을 위한 데이터 정리를 하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었다. 준하와 보냈던 단 한 번의 시간에 흘렀던 드뷔시는 습관처럼 희서의 주제가 되었다. 행복의 짜릿함과 쾌락의 고통과 가볍고 즐거운 왈츠 같은 대화들을 드뷔시가 다시 들려주고 있었다. 미주는 그런 희서를 질투하며 바라보곤 했다.
"그 사람은 어때? 글을 쓴다고 했었잖아?"
미주는 서른이 다 되어 만난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애초에 결혼은 자기 삶에 없다고 공언했었으니 사람이 생기면 어떤 사랑을 할 건지 어떤 약속들을 할 건지 궁금했다.
"응, 난 그 사람이 글을 쓸 때 가장 매력 있더라. 몰입해 있는 그를 볼 때마다 범접할 수 없는 그런 힘이 느껴지거든. 아마도 난 그런 그의 힘에 기대 사는지도 모르겠어. 몰입하는 사람은 자기를 모두 그 대상에 내줘버려서 투명해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그럴 땐 말을 걸어도 소용없지. 투명하니까, 내 말이 그 투명을 지나 빠져 날아가 버리거든. 그런 그가 미치도록 좋아. 바로 그 빠지는 대상이 되는거잖아. 글쓰기는 그 사람 자신인 것 같아."
미주의 집에 같이 지내다가도 훌쩍 떠나기도 하는 미주의 사람은 미주를 충분히 행복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같이 있을 때 서로 나누는 신비하거나 뜨거운 격정이 그의 부재마저도 가득 채워주는 듯했다. 저런 삶이라면 결혼이라는 사회적 결속의 강제가 꼭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희서 또한 결혼을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준하도 희서도 서로의 시간을 충분히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 기쁘고 신기할 뿐이었다. 온라인에서 톡을 할 때도 전화를 할 때도 만나 차를 마시거나 같이 식사를 하면서도 그 시간들이 둘 만의 삶이 되는 것이라 여겼다. 결혼을 해도 하지 않아도 같이 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의 시간이 둘에게 편했지만 희서는 준하의 다른 시간에 자꾸 욕심을 내고 있었다.
구속하지 않으며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독립적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랑하니까 마치 항상 같이 있어야 한다는 불가능한 바람이 가끔씩 희서를 흔들었다.
어렸을 때 정서적으로 보호받지 못했던 희서의 관계 정체성이 한꺼번에 욕심을 내는 것 같았다. 같이 있을 때는 한없이 행복하고 기쁘다가도 잡은 손을 놓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 만날 때까지의 그 혼자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 방황하고 있었다. 왜 사람은 배운 대로 살지 못할까.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는데 말이다. 미주처럼 서로 떨어져 있어도 충만한 그런 느낌은 대체 어떤걸까.
집착은 불면으로 이어지고 불면은 마음의 안식을 허물어 더한 집착을 불렀지만 내색을 하진 않았다. 언제나 이성이, 문득 시작될지도 모를 불행의 찰나를 막아서고 있었다. 계속 희서의 신경이 예민해지고 있었다.
"둘이라는 건 하나로 완벽해지는 길인 거 같아. 네가 있어서 내 삶이 채워지는 것처럼 말이야. 너의 시간과 공간이 나의 시간과 공간이 되는 삶에 감사해. 만날 때도 이렇게 잠시 떨어져 있어도 우리가 하나라는 건 느끼니까."
준하마저도 희서와 물리적으로 같이 있지 않아도 항상 함께 있었다. 그의 진심이 느껴질 땐 희서가 가야 할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기쁘고 충만한 마음을 희서는 속으로 질투하고 있었다.
나는 너를 이만큼 생각했는데 너는 어떠니? 네 삶에 나는 얼만큼이니? 그런 유치한 질문들이 희서 안에서 그녀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받고 나서 주는 사랑, 주고 나면 받기를 원하는 사랑, 그런 계산적인 공식에 진저리 치면서도 희서는 자꾸 준하를 모자라했다.
여느 때처럼 거실에서 음악을 듣다가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문득 날짜를 세다가 머릿속이 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