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하는 딸아이의 이름을 '로아'라고 지었다. 바르고 맑은 길을 걸어가라는 의미라 했다. 하얗고 포동포동하게 천국처럼 준하와 나에게 로아가 왔다.
나의 눈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스트레스에 영양 섭취가 잘 되지 않아 생기는 일시적인 증상일 거라 주치의가 말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찌르는 듯 아프거나 검은 기둥 같은 것이 눈에 어른 거리면 괜한 공포가 왔다.
한 학기를 쉬기로 했었지만 그다음 학기도 그다음도 수업을 하기에는 몸이 무리였다. 힘겹게 아기를 낳고 끊임없이 눈이 뜨거워지며 두통에 시달렸다. 편두통이야 대학 때부터 가끔 오던 것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사실 그때 병원에 갔어야 했다.
시야가 뿌연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어떻게 해도 글자를 제대로 읽을 수 없으니 수업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일시적인 증상이라던 울렁거림 뒤에 오는 구토와 두통은 이후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로아는 무럭무럭 자랐다. 새벽에 가장 먼저 일어나 내 어깨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내 이마를 쓰다듬는 일이 로아가 잠에서 깨어 가장 먼저 하는 일이었다. 돌이 막 지나며 걷기 시작하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가만히 순둥거리며 뒹굴다가 기어 다니지도 않고 곧바로 벽을 잡고 일어나더니 한 발씩 걸어서 준하와 나를 놀라게 한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로아는 나를 엄마가 아니라 '임마'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로아가 하나씩 배우는 말의 소리를 연구하고 분석하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보냈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강의를 하게 되면 로아가 하나씩 배우는 언어 소리로 더 생생한 예를 들어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흥분도 있었다.
나는 로아에게 나를 희서라고 부르도록 연습시키고 있었다. '희'가 목의 깊숙한 곳에서 나는 어려운 소리였지만 계속 둘이 마주 앉아 희! 이! 희! 이! 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의 반복은 기계적이지 않다. 같은 소리처럼 들려도 모든 소리에 의미를 얹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걸 볼 줄 알면 가르치기 위해 무작정 무의미한 반복을 시키지 않게 된다.
로아는 엄마인 나의 얼굴을 보면 희서가 떠오를 것이고 희서라고 부르면 나의 얼굴이 웃는다는 것을 알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엄마의 웃음은 아이의 생명과도 같다. 엄마의 까꿍이 아이의 하루를 기쁨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
얼마나 남았을까. 매일 아침 환상으로 초대하는 안갯속에서 눈을 뜬다. 오늘은 얼마나 안개가 짙을까. 오늘 안개의 색깔은 흑백의 어느 중간쯤일까. 내가 본 찬란한 수백수천의 색깔들의 채도가 낮아지고 있었다.
눈이 닫혀버려 세상의 색깔이 장기 기억 속에서만 유유히 흔들리게 될 시간에 대한 공포 속에 여전히 흐리게나마 보이는 아침에 감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