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5-1
처음 쓴 가장 긴 이야기, 장편소설, '블루 헤이븐'을 마쳤습니다. 그렇게 모두 다 떠내 보내야 하는 것들이었나 봅니다. 하얀 홀씨들이 날아올라 투명하게 사라집니다.
좋아하고 금세 빠지고 맹목적으로 귀 기울이며 따라갔다가 길을 잃기도 합니다. 마주하고 사랑하고 돌아서며 냉가슴이었다가 갑작스레 열병을 앓으며 삽니다. 그런 뜨거움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노트 제본을 하다가 손가락을 다쳐 뭉글 거리며 흘러나오는 핏방울을 본 날, 소설을 시작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 붉은 기운 안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이야기의 씨앗들을 건져 올리기로 했어요. 그렇게 하고 싶었던 시간들이 오래 쌓이고 있었지만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막상 끝내고 보니 저는 해피엔딩이라 했지만 그 반대로 보기도 합니다. 입 안의 모래알처럼 꺼끌 거리는 순간들, 시간과 공간을 같이 겪었을지라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비쳤을 부분들, 여전히 가만히 남아 저를 성장시켰던 이전을 지금과 연결하여 더 풍성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리도 질척하게 마주 보며 서 있고 싶었으나 결국 돌아서야 했던 사람들, 저를 포함한 그들의 잔상을 그려내길 원했습니다. 제가 대학 때 큰 애정을 가지고 토론에 골몰했던 그 독서동아리의 뜨거운 분위기에서 사랑의 실마리를 건져내 소설 속에 수를 놓고 싶었어요.
일찍 돌아가신 엄마의 '돌아오지 않음'을 깨닫는 데 꽤 오래 걸렸습니다. 뒷마당을 돌아 모래더미를 파보기도 하고 주방에 나가 엄마가 아끼던 그릇들이 가득한 진열장 구석을 한참 들여다보기도 했어요. 그런 기억들을 희서가 떠난 후 엄마를 찾아다니는 어린 로아의 낯설고 슬픈 방황과 허전함으로 내려놓았어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방황은 끝날 줄을 모르고 여전히 모래더미를 뒤집니다. 하지만 때가 온 것임을 직감합니다. 제가 세상에 내놓은 제 아이를 옆에서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저의 눈빛과 품과 말을 온전히 하여 건네주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이제야 합니다.
아플 수도 있을, 눈물을 보이기 싫을 수도 있을, 죽기 살기로 살거나 또는 죽을 수도 있을 삶을 그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사랑했고 그를 애타했고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들을 보내주었고 다시 새로운 그를 사랑합니다. 눈으로 보는 세상이 없어도 살아갈 만큼의 힘을 가지려는 안간힘입니다.
살얼음 같은 예민한 순간들이 지금은 몽롱한 퍼즐처럼 남아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는, 아주 오래전 읽은 한수산의 소설, '이별 없는 아침(1992, 중앙일보사)'은 제가 사는 동안 같이 했던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쁘거나 아픈 순간들을 글로 써보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겨 왔습니다.
이제 긴 이야기는 여기서 매듭지으려고 합니다. 끈기를 배웠으니 이제 부싯돌의 불꽃같은 짧은 순간이 주는 영원에 대한 고민을 하려고 합니다.
장편소설을 쓰는 동안 발행 버튼을 클릭하는 순간 눈앞이 막막하고 캄캄했던 시간을 하도 겪고 나니 글쓰기를 대하며 겁이 조금 줄어든 것, 그게 제가 소설을 쓰면서 얻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로 지금 엄습하는 이 두려움은 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