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보다 가지 않을 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가지 못한 길, 아쉬움보다 흔적이 적은 길을 선택한 큰 삶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흔적 많은 길에 미련은 없다. 그때로 돌아가도 분명 살아온 그대로 똑같은 길로 돌아서는 아집을 지금도 느낀다. 여전히 떠날 것이고 여전히 고백하고, 맞서느라 힘들 것이다. 전쟁처럼.
내일이 오지 않아도 후회 없다 하다가도, 내일이 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말로 할 수 없는 애잔한 바람들을 그래도 한 번쯤은 열어보려는 것인지 또 떠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런 갈팡질팡한 집착, 괜한 이 가을 탓을 한다.
이 가을엔 가지 않을 길을 켜켜이 쌓는다. 책을 읽으며 그러지 않아야 할 마음을 쌓고, 사람을 보며 접어야 할 마음을 쌓고, 일을 하면서 초심의 잃음에 대한 두려움을 쌓는다. 이 쌓음이 내 삶이 될 텐데 왜 가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 가끔은 억울한 생각도 든다. 그러면 안 되나 안 접으면 안 되나 잃으면 안 되나.
지금까지 잘해왔으니 조금은 내려놓아도 된다는 말은 두려운 맞닥뜨림이다. 정말 내려놓아도 되나.
10살 단위의 모든 내가 평행선 위에 여전히 고투하고 있는,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 같은 몽상 속에 가을이 시작되었다. 그때는 이래서 힘들었구나 그땐 그래서 눈물 흘렸었구나.
지금 이렇게 단정하게 새벽에 깨어 그림 수업을 받으며, 골라두라한 색깔들을 제쳐두고 슬금슬금 선생님 눈치 보며 마음의 색깔로 끄적거린다. 확연한 다름 속에 일말의 쾌감들이 마음속에 따끔거린다. 완전히 다르게 그렸다 생각했는데 거리를 두고 가느다란 실눈으로 보니 이 또한 가을이다. 나만의 가을.
작은 깨달음 속에 가지 않을 길을 정리하고 가야 할 길을 애써 떠올린다. 인생이 그런 거라니까 가본다.
쓸쓸함을 처음 느껴보는 가을 같다.
그림 - 가을의 향 by 희수공원 230919
#라라크루5기 (3-2) #라라라라이팅 가을이라는 핑계에 숨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