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박열>의 포스터가 공개된 이후 많은 이들이 이제훈의 파격적인 외모 변신에 놀랐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새로운 연기에 대해서도 기대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 내용과 인물을 잘 몰랐던 나는 한편으로는 또 남성 주인공을 전면에 앞세운 한국 영화, 게다가 독립운동가에 대한 조금은 뻔한 영웅화가 이루어지는 영화는 아닐까 하는 편견으로 개봉 직후에는 굳이 볼 생각을 안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박열'이라는 인물이 아나키스트였다는 점, 그리고 '가네코 후미코'라는 인물의 비중이 굉장한 영화라는 이야기를 듣고 꼭 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조선의 개새끼로소이다'라는 구절에서 느껴지는 그 처절한 반항의 언어들도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그 거친 언어에 매력을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영화는 이 시를 읽고 박열을 찾아와 대뜸 '우리 동거합시다'라고 외치는 가네코 후미코의 낭독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는 영화 내내 박열과 함께, 혹은 어떤 때에는 그녀 혼자서, 관객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주인공이 된다.
가네코 후미코, 그녀의 신념
박열의 연인이기 이전에 사상적 동지였던 그녀의 신념은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녀는 일본인이면서도 천황의 존재가 허황된 것임을 깨닫고, 철저하게 민중과 약자의 편에 선다. 그리고 그들의 편에 서기 위해, 더 큰 힘이 되기 위하여 배우고, 글을 쓴다.
박열의 반항의 시를 읽고 그를 찾아낸 것은 철저히 그녀의 '선택'이었고 자신의 '눈에 찬' 동지, 박열과 함께 그녀의 신념을 더욱 굳건하게 다져간다.
그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개인의 주체성과 자유이다. 강력하게 써 내려간 동거 계약서에도 드러나듯, 박열과의 관계에서도 수평적인 관계를 요구하며 서로의 사상이 달라질 경우 공동생활을 그만둘 것까지도 주장한다.
그녀가 서로의 관계에서 얼마나 자율성과 주체성을 중요시했는지는 각자 심문을 받게 될 때, 박열이 남겼던 '나는 그녀의 주체적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말에 환하게 미소 짓는 장면에서도 느껴진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인이었던 그녀의 전향을 회유하는 이들에게도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이런 결정은 배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지켜내고자 했던, 그리고 박열과 함께 나누었던 그 사상, 아나키즘은 당시 어떤 의미였을까?
아나키스트 박열, 모든 권력에 반대하다
당시 일본에 살던 조선의 청년들, 그리고 몇몇 일본 청년들은 무정부주의 사상을 함께 나누고 일본의 권력에 대항할 계획들을 세운다. 박열이 수감 중 썼던 시에서도 드러나듯, 모든 권력을 반대하며 인간의 주체성, 자율성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아나키즘. 20세기 초, 당시 세계는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인간의 잔인성, 전쟁의 가혹성에 대해 자정 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천황에 대한 열렬한 수호자들이 우익세력으로 뭉치는 순간에 그 반대쪽의 목소리도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마르크시즘이나 아나키즘에 대해 공부하는 좌익 청년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이들은 국제사회에 대한 이미지를 걱정하며 완전한 근대화를 이룩하고자 하는 일본 제국에게 위험요인이면서 감히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존재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민족주의, 제국주의라는 거대 담론의 뒤에 숨어 있던 권력의 숨은 욕망을 정면으로 비난한다.
때문에 영화에서는 일본의 당시 상황도 더 복잡하게 표현될 수 있었다. 영화 중간중간 일본 민중은 죄가 없다는 대사들이 발화되고, 일본 권력층도 비교적 납작하지 않게 표현된다.
영화 후반부에 박열을 면회 오는 인물들은 조선인 유학생들, 일본의 문학가들, 일본 좌익 청년들이며 이는 그의 사상이 국적과 민족을 떠나 있음을 보여준다.
삶 그 자체로도 한 편의 영화 같았던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의 이야기는 이준익 감독에 의해 영화로 기록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2017년에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이들의 사상과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끝으로 가네코 후미코를 열연한 최희서 배우는 모 인터뷰에서 '여성의 다양한 모습과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연기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그녀의 바람대로, 그리고 많은 관객의 바람대로 앞으로 <박열>에서처럼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이 스크린에 더 많이 등장하기를. 그래서 가네코 후미코와 같은 여성들의 삶을 풀어내는 영화가 더 많이 나타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최희서 인터뷰 - IZE, http://ize.co.kr/articleView.html?no=2017071323137265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