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
하루 걸러 하루, 이상하고 요상한 일들로 머리로 열이 몰릴 때가 있다. 그건 일상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문제일 때도 있고 들려오는 이런저런 사회 문제들일 때도 있다. 제정신으로 사는 게 어려울 정도로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게 바로 요새의 현실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잠시 현실을 잊어보려 TV를 켜 요즘엔 뭘 하나 살펴보려고 하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대체 뭘 봐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기분 좋게 웃기만 할 수 있는 콘텐츠 찾기가 정말 어렵다. 최근엔 불편하지 않은 좋은 프로그램들도 몇몇 기획되고 방송 중이기도 하지만, 그 방송들을 내가 우연히 볼 확률은 현저히 낮다. 방송 시간대가 그리 인기 있는 때에 편성되는 것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그 수도 적은 편이니까. 대부분의 채널에선 여전히 어딘가 불편한 설정의 드라마가 방영되며, 어딘지 답답한 기분이 드는 웃음 코드가 만연하다. 가볍게 웃으면서 쉬고 싶었는데, 막상 좋은 기분으로 웃으며 볼 만한 콘텐츠가 없어 슬프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그런 고민을 해소해주면서도 재미를 놓치지 않은 기특한 작품이다. 일단은 설정부터가 흥미로운데, 여주인공 안은영이 한 고등학교에 보건교사로 발령된 시점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런데 사실 이 고등학교의 터는 어마 무시한 사연이 있는 곳이며 안은영은 보건교사이지만 귀신을 보는 퇴마사이기도 하다...!
일단 이런 흥미로운 설정에 더해 안은영은 엄청난 양기를 내뿜는 홍인표와 에너지 충전이랍시고 습관적 스킨십까지 하는 것이다. 이런, 벌써 흥미진진. 둘은 미묘한 썸을 타면서 학교를 둘러싼 사소한 모험들을 하나 둘 해결해간다. 안은영이 주인공 홍인표가 보조캐릭터인 셈인데, 여성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불편한 지점 없이 또렷하게 집중할 수 있게 그렸다. 그래서 둘의 연애스토리의 분량 비율이 적고, 안은영이란 인물 자체에 집중했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그러면서 안은영이 만나게 되는 인물들도 여럿 있는데 이들의 캐릭터도 매우 뚜렷하고 진해서 인물들에 애착이 가기도 한다. 그만큼 가상의 인물들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썼을 것 같은 작가의 다정한 시선이 느껴질 것이다. 게다가 에피소드 형식으로 묶여서 장편을 읽는다는 부담도 없이 가볍게 읽힌다는 것도 장점이다.
한편, 소설 속에서 안은영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바로 '기운'이라는 말인데,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이상한 기운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짜릿하고 가뿐한 손날림으로 탁한 기운을 올바르게 돌려놓는다. 그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요새 자주 아팠던 어깨가 탁한 기운 때문인가..? 하다가, 안은영의 가벼운 손날림이 내 기운을 맑게 바꿔 주는 것 같은 상상이 들기도 한다. 내게 쌓였던 유해 물질이나 탁한 기운들이 해소되어가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분은 단지 재미와 독특한 컨셉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정세랑 작가는 작품 곳곳에 약자와 소수자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무겁지 않게 잘 녹여내는 능력이 있다. <피프티 피플>에서도 그러했고,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소설을 읽다 보면 내가 어떤 가치를 우위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고 건강한 삶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을 웃음과 함께 삶의 건강한 기운들을 충전하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어 보시길.
내가 너를 싫어하는 것은 네가 계속 나쁜 선택을 하기 때문이지 네가 속한 그 어떤 집단도 아니야. 이 경멸은 아주 개별적인 경멸이야. 바깥으로 번지지 않고 콕 집어 너를 타깃으로 하는 그런 넌더리야.
(210쪽)
사람보다 다른 것들이 비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값없게 느껴졌다.
(189쪽)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265쪽)
무언가 알 수 없는 나쁜 기운들이 내 생활을 방해하는 것 같을 때,
그래서 기분전환이나 하고 싶은데 마땅히 볼만한 재밌는 콘텐츠가 없다고 생각될 때,
무해하고 안전하면서도 기분 좋게 재밌는 이야기를 찾고 있을 때,
읽어 보면 좋을 책.
- 기분 나쁠 포인트 없는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를 찾으시는 분들께
- 한국소설은 거의 비슷한 내용이거나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 인생노잼시기에 재미 한 스푼이 필요한 분들께
TMI 소개
- <보건교사 안은영>은 특유의 재미와 구체적인 캐릭터 설정, 에피소드식 구성으로 독자들이 드라마화를 간절히 바라는 작품이기도 하다. 구글에 '보건교사 안은영'을 치면 연관검색어로 '보건교사 안은영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넷플릭스'가 뜬다. 그만큼 여자 주인공 '안은영'역할에 누구를 캐스팅하면 좋을까 상상하며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트위터에선 박보영, 한지민 배우 등이 언급되었으며 나 또한 영상화를 상상하며 읽게 되었는데 떠오르는 여주인공은 이하나, 서현진 배우였다. (읽으신 분들 중 떠오르는 배우가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시길.)
- <보건교사 안은영>은 워터프루프북 시리즈로 제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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