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단추가 만드는 나만의 스타일
필라테스를 배운 지 어느덧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엔 약간의 자신감이 생긴다. 선생님의 티칭 스타일에도 적응이 되고, 익숙한 동작들이 생기기 때문. 그런데 이 즈음 내겐 다시 초보의 마음이 되었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늘 배우던 선생님이 잠시 교육 출장을 다녀오시게 되어서, 다른 선생님께 배우게 되었다. 기존 선생님께선, 이제 매주 1타임은 새로운 선생님 수업을 받아 보는 것을 권하셨다. 같은 운동이더라도 선생님마다 티칭 스타일이 조금씩 다르다며. 처음엔 의아했다. 같은 운동인데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선생님과의 첫 수업. 역시 내 착각은 와르르 무너졌다. 분명 똑같은 동작인 것 같기는 한데, 무언가 속도감이 달랐다. (이건 역시 초보여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사소하지만 어딘가 조금은 달라진 느낌이었다. 그러다, 수업 중 선생님은 원래 자신은 발레를 하던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아!'싶었다.
생각해보니 기존 선생님은 필라테스를 하시기 전 '요가'를 먼저 배우셨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수업에 요가 동작 스트레칭도 종종 했었고, 마지막에 휴식 시간을 갖기도 했었다.(요가의 맨 마지막 동작이 사바사나, 전신의 힘을 다 풀고 누워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새롭게 배우게 된 선생님은 '발레'를 먼저 배우셨어서 그런지 손과 발에 포인트를 주는 것이 마치 발레 동작과 연결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둘 다 같은 필라테스 수업이었고, 조금씩 티칭 스타일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생각했다.
같은 운동을 하더라도 처음에 무엇을 먼저 배웠느냐에 따라 스타일이 바뀌는 건 신기하고 재밌었다. 운동뿐이겠는가.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무엇을 먼저 배웠느냐에 따라 일 하는 스타일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어떤 것을 첫 단추로 채웠는지에 따라서 그에 따라 유연하게 그다음 스텝이 이어진다. 첫 단추로 배웠던 많은 기준들을 그다음 단추로 조금씩 맞추어 가면서.
정세랑 작가는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다. 전공 시험지를 내밀면 늘 교수님들께 문학이 더 어울린단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고 하지만. 결국 그는 문학으로 넘어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자주 사용하는 소설의 시간이나 배경엔 역사 소재들이 꽤 많다.
아마 다른 분야들도 그럴 것 같다. 무언가 내가 처음 제대로 배우고 익혔던 것, 또는 나의 베이스로 가장 많이 채워져 있는 것들은 알게 모르게 지금 내가 하는 일들에 밀접하게 닿아 있을 것이다.
현대 미술을 좋아하는 영화 감독, 문학을 전공한 웹디자이너, 생명공학을 전공한 소설가….
서로 다른 두 요소가 더해져서 만들어지는 케미스트리가 분명 존재할 것이고, 그건 그 사람 고유의 스타일을 더 빛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렇게 다른 분야로 넘어와서도 이어지는 나의 기본 베이스가 있다는 건 꽤 근사하고 멋진 일인 것 같다. 다 같은 일을 하는 듯 보이더라도 다양한 분야에서 출발한 이들이 각자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듯 일상을 일구어 나가는 것을 상상해보면 더더욱. 다 같은 리듬으로 반복적인 춤을 추는 것보단, 조금씩 다른 방식의 춤을 추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근사하게 느껴진다. 마치 내가 똑같은 학원에서 필라테스 수업을 들었지만, 선생님의 운동 베이스에 따라 조금은 다른 성격의 수업을 경험했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니 내 첫 단추는 무엇일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지금 나의 일들에 닿아 있을지 궁금했다. 그 첫 단추가 이루고 있는 나의 베이스를 잘 닦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닳거나 낡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고집스럽고 견고하지도 않게, 유연하게 발전시키며 성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