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rlotte Mar 22. 2022

용기

용기, 건너편 카페에 앉아 친구들을 기다리다 발견했다. 좋아하는 초록나무들이 빼곡히 보여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컨디션에도 가보고 싶게 만든 그곳. 궁금한 건 못 참는 터라, 잠깐만이라도 들려봐야겠다 싶어 결국 문을 열었다. 미쳤다-, 여기에 그냥 주저앉고 싶은데-, 정해진 일정이 있어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이상하리만큼 식물에 가득 뒤덮인 공간에 숨이 멎는 나는, 정글처럼 꾸며진 이 공간에 마음을 다 뺏겨버렸다. 언젠가는 직접 운영하고 싶다고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그림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제각각 다른 식물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뿜어내며 원래 그 자리에서 뿌리내리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그런 정글 같은 곳. 그런데 이름은 왜 용기일까, 어울리는 이름은 아닌 것 같은데. 약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의문점만 남긴 채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어김없이 찾아온 마지막 날 저녁, 너무 피곤해서 간단하게 술 한잔 할 곳을 찾다 숙소와 가까운 거리라서 혹시나 하고 들려봤다. 지갑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나온 터라 간단하게 한 잔만 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자리에 앉고, 내가 좋아하는 필요한 만큼의 친절을 겸비하신 스태프분들의 응대와 메뉴판에 적힌 음식들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니, 밤늦게까지 이 공간에 녹아들고 싶어 졌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사장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해졌다. 어떤 삶을 살아오셨을까-하는, 가게 곳곳 에피소드가 가득할 것 같은 디테일이 그렇게 만들었다. 나에게 시간이 며칠만 더 주어졌더라면, 정말 여유롭게 이 공간을 드나들면서 지금 보지 못하는 또 다른 모습들을 보고 싶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이 공간에 있는 내가 자연스러워질 때 즈음, 사장님과 담소를 나누어볼 기회를 엿보지 않았을까. 짧은 사이에 여러 생각이 스쳐감과 동시에, 항상 무겁게 짐을 가지고 다니다가 하필 지금 빈손으로 나온 내가 원망스러워졌다.

웬만해서는 귀찮아서 엉덩이를 쉽게 떼지 않는 편인데도, 용기는 나를 숙소로 다시 가게 만들었다. 그렇게 다시 프로 봇짐러의 모습으로 돌아와 자리한 세 번째 용기. 자리에 앉으니 정신도 조금 없고, 급하게 다녀오느라 약간 덥긴 했지만, 주문해놓은 화이트 와인을 한잔 마시니 죽어있던 세포들이 토도독 깨어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탄산이 잔에 담겨 방울방울 터지듯이 한 모금, 한 모금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마다 춤을 추는 것 같았달까. 배부른 상태가 아니면 모든 메뉴를 다 먹어보고 싶어질 정도로 메뉴판을 볼 때마다 웃음이 절로 났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술은 한 잔씩 다 먹어보고 가겠구나-였다. 심지어, 와인인데 42도라는 술도 있어서 두근거리기도 했다. 정말, 이 정도로 술에 진심인 내가 재밌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면서, 다음 여행의 콘셉트는 알코올 여행으로 잡아볼까, 생각마저 들었다. 여행지에 가서 새로운 곳에 가면 그 장소를 기억할 수 있는 술을 먹어보는 걸 좋아하는데, 이 가게의 시그니처는 챠챠가 되는 걸로- 혼자 정했다. 사장님도 가게에서 제일 좋아하시는 술이라며 추천도 해주셨고, 나도 처음 보고 맛보는 술인 데다가, 향도 맛도 너무 내 스타일이라 다음날 오전 비행기만 아니면 주구장창 앉아서 취하고 싶은 맛이었다. 이름도 귀여워서 자꾸 중얼거리게 되는 챠챠. 부산에 가서 파는 곳을 찾을 수 있으려나.

그렇게 직접 담근 매실과 안동소주로 만든 하이볼까지 맛보고 나름 자제한답시고 마지막으로 챠챠를    시키고 자리를 나섰다레드와인과 맥주를 빼고는 결국  마신게 그렇게 뿌듯했다계산할  사장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테이블마다 식물들이 파티션처럼 공간을 나눠주고 있어서 불편하지 않게 정말 시간 가는  모르고 여유롭게 책을 읽고다이어리를 쓰고글을 끄적일  있었다혼자 술을 마시러 가면 보통은 작은 자리에 앉게 되거나 바에 앉게 돼서 생각보단 오래 머물지 못했는데, 4인용 테이블을 혼자 널찍하니 차지하고 앉을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마치 집에서 혼술을 하는듯한 느낌인데, 정글 같은 곳에서 좋아하는 술들을 마실  있어 더할 나위 없었던심지어 조용히 즐기고 싶어 자리 변경을 요청드렸는데도 정말 친절하게 응대해주셔서 마음이 너무 편했다얘기는 많이 나눠보진 않았지만짧게 주고받은 말들과 눈빛들 속에서 내가 느낀 사장님들과 스태프분들도 혼술이 주는 무드를 사랑하시는게 아닐까하는 나만의 생각과 그보다  많은 감성과 철학을 가지고 계실  같다는 것이었다그래서 정말 불편함 없이편안하면서도 새롭고 분위기 있게 즐길  있던  아닐까공간마다메뉴판에 나열된 이야기들 마다그릇에 담긴 음식의 모양새맛과 향기들 모든   이유가 있어 보였다심지어 화장실  손잡이 까지도내가 좋아하는 민트색 계열이어서  그렇게 느꼈겠지만정말 화장실 가는 순간까지도 감동을 받았다이렇게까지나 유니크하다니제주에 살았더라면 정말 자주 왔을  같은 부산에 생기면  근처로 이사도 가고 싶을 정도로너무 좋았다저녁에 비가 쏟아진다고 했었는데 마실 생각에 신나서 우산도 챙기지 않고 와서 걱정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리를 쉽게 뜨고 싶지 않았던혹시나 못쓰는 우산이 있을까부탁드렸는데 멀쩡한 우산을 쓰지 않는다며 챙겨주신 따뜻한 배려까지.

다음날 여유 있게 머물렀으면 감사한 마음과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다음 여행에서 꼭, 꼭, 다시 들려 전해야지. 또 제주가 오고 싶은 이유가 명확하게 생긴 밤이었다. 신기하게 음식 냄새까지도 부담스럽지 않던 이곳, 메뉴들도 그렇게 의도하고 만드신 걸까. 이렇게 다 좋을 수 있나, 정말 마법에 걸려 좋은 것만 보게 된 것 같은 느낌까지 들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던, 용기. 그 안에서 읽은 책의 내용도 그렇고, 가게 이름도 그렇고, 나에게 정말 용기를 전해준. 용기 한 잔에서 네 잔까지. 다음에는 몇 잔까지 마시게 되려나. 그때도 와서 사진으로 남겨봐야지. 경험하지 않을 때는 알 수 없었던 용기였는데, 남겨놓은 어느 사진들을 보아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 제일 많이 느꼈던 감정들을 한 단어로 정리해버린 용기.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지니는 것-이라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야기처럼, 새로운 경험을 하지 않고서는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힘은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이번 여행. 색다른 일상에서 갖게 된 눈으로 평범했던 일상을 또다른 이야기들로 가득 채울 생각을 하니 아쉽기만 했던 안녕도 조금은 기대가 되는 것 같기도. 이젠 또 어떤 침대 위의 비밀 이야기가 펼쳐지려나.

이전 21화 정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