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대화를 잘 이어 나가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내는 나의 쉬운 방법은 공통점 찾기였다. 요즘은 그런 질문들이 많이 실례가 되는 시대가 되었지만, 불과 한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어디에 사세요, 어느 학교 나왔어요, 무슨 회사 다니세요 등등의 사적인 질문을 하다 보면 한두 가지의 공통점은 쉽게 찾을 수 있었고 그렇게 대화를 이어 가고는 했었다. 내가 아직 결혼하기 전, 그리고 세상의 분위기도 지금과는 조금 달랐던 10여 년 전만 해도 '결혼은 하셨어요?' 하는 질문도 정말 부담없이 했던 것 같다. 하긴 그땐 어딜가나 그랬다. 돌아보면 나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조차 '여자친구는 있어요?'라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었으니까. 그게 그렇게 실례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살았다.
결국 아내와의 이혼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나는 부끄럽게도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이미 이야기를 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솔직하게 밝혀야 했다. 그게 나도 편하고 그 사람들도 편했다. 그래야 나도 숨 쉬듯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셈이니까.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사람들, 대표적으로 회사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아무 문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로 했다. 마침 이사한 동네도 아내의 회사 쪽으로 더 가까워진 셈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기가 나쁘지 않았다. 나 스스로 내가 정말 혐오스러워지는 부분은 가족수당 때문에 회사에다가 아내가 가족수당이 나오는 회사로 이직할 것 같다고 이야기한 점이다. 참으로 뻔뻔하다. 나는 이런 내가 정말 혐오스럽다. 그 외에 그냥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는 굳이 결혼을 했다가 돌아왔다고 이야기할 것까진 없었다. 그새 시대가 달라져서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직설적으로 하지 않는 시대이기도 하고. 혼자 사는 것은 사실이기에 그냥 혼자사는 척만 하면서 사람들을 대하기로 했다. 어찌 보면 남들을 속이는 나쁜 행동이지만.
지지난주에 어떤 분과 회의를 하러 그분이 사는 동네 근처로 갔다. 그분이 사 주신 차를 마시고 회의를 잘 마무리하고 헤어지려는데, 그분께서 갑자기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사서 보내겠다고 하시며 나를 백화점 지하로 이끄셨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커피는 법인카드로 샀어야 했는데' 원래 차를 주문하려고 법인카드를 챙겨 나왔었는데 그분께서 사시기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뭐라도 사 주신다니 괜시리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편안한 생각에 빠져 있던 와중에 나를 백화점 지하로 끌고 내려가시던 그분께서 갑자기 '그런데, 결혼은 하셨어요?' 하고 물으셨다.
아, 이래서 약을 제때 챙겨 먹었어야 했는데. 실은 차를 마시며 회의를 하느라 약 먹을 시간을 놓친 상태였다. 동네로 와서 저녁을 먹기 전에 약을 먹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그분께 그런 질문을 받으니 세상이 하얘졌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내가 생각했던 구분에 없는 경우였다. 그분과는 태어나서 두 번째 본 사이였다. 물론 알고 지낸지는 1년은 되었지만. 1년 전에 한 번 연락하고, 1년만에 다시 연락한 사이이기도 하고. 내가 최근에 세운 원칙(?)대로라면 이분께는 미혼이라고 해야 맞았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할 수 없는 게, 나를 아는 많은 분을 알고 계신 분이었다. 물론 뭐 그분들께 나의 결혼 여부까지 확인하지는 않으시겠지만. 그래서 엄청난 혼란이 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결혼을 했다고 대답하기도 우습고, 그렇다고 안 했다고 대답하자니 다른 분들께 물어보면 금세 아실 수 있을텐데. 태어나서 두 번 만난 사람에게까지 굳이 '저는 다녀왔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게, 그 상황에서 나는 얼결에 '아니, 그걸 왜...' 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도무지 할 말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또 약을 먹지 않았던 탓에 그렇게 침착하지 못하기도 했던 것 같다. 다행히 그분도 나와 두 번째 만난 사이라는 것을 고려하셨는지 내 대답에 더는 뭐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에게 들려보낼 디저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답변이었다. '아니, 그걸 왜...'라니 어른인데 물어보실 수도 있지. 지금 그걸 대답이라고 한 건가?
사무실에서부터 약은 챙겨 나왔지만 물이 없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까지 미처 약은 먹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선은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친구니 여자친구니, 애인이니 결혼이니 이런 질문들을 예의 없이 얼마나 많이 했던가. (그러나 또 막상 돌이켜 보니 눈치를 보느라 내가 나서서 그렇게 묻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결국 나는 내가 했던 잘못을 돌려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은 진작에 착하고 성숙하게 살았어야 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결혼생활에 얼마나 안정감을 느꼈었는지도 돌아보게 되었다. 돌아보면 나는 나와 그렇게 가깝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결혼했다는 사실에 대해 아주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편이었다. 오죽하면 아내에게도 나를 3인칭으로 '남편'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고, 아내도 나를 '남편'이라고 많이 불렀었다. 생각해 보면 그건 우리가 사이가 좋았던 아주 예전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만약 아내와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그분께도 편하게 '아, 네, 지금 한 7년 정도 됐어요' 이렇게 대답하면서 편하게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것 같은데. 내가 아무리 뻔뻔하지만 굳이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없는 사실까지 지어내 가면서 이야기할 정도의 위인은 못 된다. 그 바람에 그분의 질문이 나를 더 씁쓸하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한동안은 만약 다시 이런 상황에 처하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에 대해 상당히 오래 고민을 했다. 앞으로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그냥 웃으면서 '아, 저는 혼자 삽니다'라고 대답하려고 한다. 듣는 사람이 어떻게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저 말이 가장 가치중립적이면서 솔직한 대답인 것 같다. 실제로도 나는 혼자 살고 있고, 아마도 상당히 오랜 기간 그렇게 될 것 같고. 물론 굳이 나의 결혼 사실을 아는 분들에게까지 쫓아다니며 '아, 저는 혼자 살아요'라고까지 말할 생각은 없지만. 왜, 그분께서 '그런데, 결혼은 하셨어요?' 하고 물어보셨을 때, '저는 혼자 삽니다'라고 쉽게 대답하지 못했는지 이불킥하게 된다. 아마도 항상 지금 이혼과정 중에 있다는 사실을, 아내와 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의식하고 있어서 그랬겠지.
특별한 사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분과는 다시는 연락할 일이 없다. 이렇게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과의 스쳐지나감 속에서조차 아내와의 작별을 실감하게 된다. 언제쯤이면 모든 것이 아무렇지도 않고, 담담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