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상전이나 몸종이나

만석꾼의 며느리와 아나키스트

by 은예진

― 이년 전 이천 율면


“아씨, 어르신께서 사랑채로 주안상 내오시래요. 재 너머 곽 서방이 이번에 농사를 잘 지어서 쌀을 작년보다 다섯 섬이나 더 가져왔대요. 어르신께서 직접 치하해 주시고 내년에는 논을 더 많이 주실 모양이에요.”


시월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본이는 주안상과 상관없는 생각에 빠졌다. 곽 서방이 농사를 더 많이 짓게 되면 올해 농사를 곽 서방만큼 짓지 못한 누군가는 논을 빼앗기게 된다는 말이다. 본이는 땅을 잃게 될 작인을 생각하자 마음이 심란하다. 그는 아무리 마름에게 사정하고 시아버지에게 매달려도 소용없을 것이다.


시아버지는 모든 것을 결과로 판단할 뿐 그간의 인정이나 작인의 집안 사정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임금님 진상미가 올라가던 질 좋은 이천 쌀을 만석이나 거둘 논을 가진 시아버지는 그걸 지키고 늘릴 생각에만 항상 골몰해 있다.


“아씨, 제 말 들으시는 거예요? 주안상요, 주안상!”


본이는 시월이의 고함에 화들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행주를 떨어트렸다. 행주니 망정이지 사발이라도 들고 있었으면 또 그 요란한 소리에 반빗아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을 것이다.


“시월아, 나 귀 안 먹었어.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니?”

“아씨, 귀 안 먹은 것은 저도 아는데요. 대신 귀를 닫고 계시잖아요.”

“쉿, 너 자꾸 그럴래?”


본이가 눈을 찡긋거리자 시월이가 반빗아치인 동이 어멈이 뒤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입을 다문다.


“몇 분이나 드실 상이냐?”


더는 답답해서 기다릴 수 없는지 동이 어멈이 끼어든다.


“어르신 하고 집사님 하고 해서…….”


시월이가 손가락으로 꼽고 있는 사이 동이 어멈이 네 분이겠구먼 하면서 상을 편다. 동이 어멈이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또 그냥 참을 수 없는지 입 모양만 움찔거린다. 그 입 모양대로라면 상전이나 몸종이나 덜떨어지기가 똑같다고 하는 것이다.


본이는 맛깔스러운 음식 솜씨로 시어머니의 총애를 받는 동이 어멈과 언성을 높여보았자 이득 될 게 없다는 생각에 모른 채 돌아섰다. 하지만 앞뒤 가리지 못하는 망아지 같은 시월이는 그냥 넘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동이 어멈, 지금 뭐라고 씨부렁대는가?

“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누구한테 시비야?”

“동이 어멈이 지금 상전이나 몸종이나 덜떨어졌다고 했지? 내가 잘못한 일에 왜 우리 아씨를 걸고넘어져? 반빗아치면 반빗아치답게 굴어야지 어디 아씨를 함부로 깔봐!”

“뭐, 뭐, 뭐 이게 진짜 누가 아씨를 깔봤다고 그러니? 네년이나 종년이면 종년답게 굴어.”


동이 어멈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동이 어멈은 자신의 목소리가 부엌 밖으로 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다급해진 본이가 서둘러 술병을 꺼내 시월이 손에 들려준다.


“너, 뭐 하는 짓이니? 어서 가서 술이나 떠 와라.”

“아씨!”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달린 시월이가 분해 죽겠다는 투로 발을 구른다. 하지만 본이는 못 본체 어서 술이나 떠오지 않고 뭐 하냐고 다그쳤다. 시월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콧김을 내뿜으며 술 단지가 있는 뒤뜰로 나갔다.


“동이 어멈, 철없는 아이가 그러는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동이 어멈은 대답도 하지 않고 상을 닦는다. 아마도 이 일은 곧 어머님에게 두어 배쯤 부풀려져서 전달될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자매이자 동무처럼 같이 자란 시월이는 본이가 조금이라도 무시당하거나 하면 참지 못하고 싸움닭처럼 군다.


몇 번 어머님에게 지적을 받았는데도 저러다 잘못하면 친정으로 쫓겨 갈지도 모를 일이다. 본이는 시월이마저 없는 시댁을 생각하면 끔찍해서 자기도 모르게 진저리가 쳐졌다.


뚱한 동이 어멈 앞에서 머쓱해진 본이는 재빨리 주안상에 올라갈 음식을 챙겼다. 맛깔스러운 잡누르미를 제일 큰 접시에 담아냈다. 편육과 잡채를 그 옆에 놓고 약과와 약식, 나박김치까지 올려놓는데 동이 어멈이 커다란 도미찜을 상에 올린다.


깜짝 놀란 본이가 이번 주안상이 도미찜까지 올라갈 상은 아니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동이 어멈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시월이는 술을 가지러 가서 담가 오느냐고 투덜댄다.


도미찜은 시아버님이 상석을 내어줄 만한 손님상에나 내놓는 음식이다. 곽 서방을 치하하고 고생하는 마름과 최 집사에게 술을 대접하는 거라고 하지만 그 상에 도미찜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동이 어멈, 어머님이 무슨 말씀이라도 하신 거요? 도미찜을 내가는 것이 맞는 것이요?”

“아씨, 제가 어련히 알아서 낼까 봐 그러세요? 어서 시월이 년이나 부르세요.”


본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사랑채로 나가기 위해 옷매무시를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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