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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Nov 29. 2024

9. 나만 예쁜 아기 사진

언젠가 내가 그다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손님이 불쑥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낯선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어버버하며 귀 귀엽네요를 했다. 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리액션이었다. 핸드폰을 내민 당사자는 호들갑스럽게 얼마나 귀여운지를 이야기하다 멈칫했다. 그리고 곧 입술을 비죽거리며 말했다.


"손자 없으시구나."


맞는 말이다. 나는 손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 손자가 얼마나 예쁘고 귀여운지도 몰랐다. 그저 손자 사진을 보여줄 만큼 가깝지 않은 사이에 그걸 내민 사람이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자 동생은 강력하게 말했다. 손자 사진을 보여주려면 최소한 커피와 케이크를 들고 가서 보여줘야 한다고. 그럼 물개박수를 쳐주며 손자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손자 사진은 당사자에게나 예쁘지 다른 사람은 전혀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손자 사진을 보여주느라 밥을 샀다. 할머니가 된 기념 턱 정도는 내고 사진을 보여주며 덕담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봤는데 대화 중에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되도록 삼가하는 게 좋다고 했다. 내가 요즘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기 이야기니 그건 여기서나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참아야 한다. 


더군다나 출산율 0.76% 시대, 자식이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선언해서 분노한 사람 이거나 아쉽지만 이해하기로 한 사람이 부지기수인 시절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아기 사진을 내밀었다가는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기에 자제하는 중이다.


아기 사진에 관한 나에게는 철없는 흑역사가 있다. 


내가 딸을 낳아 모성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요즘은 사회생활의 잣대가 엄격해져 맘충이라는 말로 옥시토신에 휩싸여 사리분별하지 못하는 아기 엄마들을 비난하는 일이 종종 있다. 내가 아이를 키우던 시절, 지금 생각하면 낯 뜨거운 맘충짓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잠시 호르몬 때문에 판단이 흐려지니 좀 이해를 해주면 어떨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받기 어려운 짓을 했다. 가까운 친구가 어렵게 가진 아기를 사산하고 힘들어하던 시기였다. 나는 그 친구를 만나러 아기를 데리고 가서 아기 사진을 늘어놓고 보여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지금의 나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손절을 백번 당해도 싼 짓이었다. 이후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 둘을 낳아 잘 키웠으니 다행이지만 나는 가끔 그때 기억이 떠올라 이불킥을 한다.


이제 아기 엄마에서 할머니가 된 나는 지금도 얼마 되지 않는 카톡 친구와 톡을 하려면 호시탐탐 아기 사진 띄울 틈을 노린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면 남들은 우리 아기에게 아무 관심도 없다는 것을 되새긴다. 아기 엄마만 옥시토신에 휩싸여 무분별해지는 거 아니고 할머니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아기 이야기는 나보다 더 정신 못 차리는 남편이랑 둘이 마주 보고 앉아서 하면 되는 것이다.


300킬로 떨어진 곳에 사는 딸부부에게서 아기 사진이 전송되는 순간 오늘도 감사한 마음에 절로 손이 모아진다. 아기는 신생아 시절을 열도 한 번 나지 않고 잘 먹고 잘자며 잘 울어재끼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조리원 신생아 실에서부터 울음이 가장 우렁찬 아기였으니 제 맘에 들지 않으면 마구 울며 의사를 명확히 표현한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초보 운전자들이 '한블리의 블랙박스'를 보면 무서워서 운전을 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세상에 저렇게 많은 사고가 있는데 그 사고가 나한테 일어나지 않으란 법이 없으니 말이다. 그처럼 SNS에 불행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요즘, 세상에는 너무 많은 불행이 있어서 감당이 되지 않을 지경이다. 특히 아이에게 닥친 온갖 병과 사고를 보면 가슴이 철렁 인다.


누군가는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는 것은 너무 용감한 일이라고까지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용감한 일이 부모를 성장시키고 새로운 생명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하루하루 봄날 새싹처럼 자라는 아기의 사진을 보며 남편과 나는 또다시 조금 더 성장하고 있다. 부모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조부모도 신비로운 생명의 기적에 놀라고 감탄하며 겸손해지고 있다. 


그래서 나만 예쁜 아기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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