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8일 토요일
새벽 운동 넷째 날, 오늘도 어김없이 4시 반쯤 저절로 눈이 떠졌다. 차라리 눈이 안 떠지면 '아이고, 깜빡했네' 라고 핑계라도 댈 수 있을 텐데... '인간아... 겨우 넷째 날이다. 누가 보면 한 마흔째 날은 되는 줄 알겠네.'
아마도 내 뇌에는 4시가 넘으면 자동으로 눈이 떠지는 알람 기능이 탑재되어 있나 보다. 고성능 알람 시스템 덕분에 쓸데없이 벌떡 일어났고, 걷는 것도 어찌저찌 무사히 마치고 돌아와서 개운하게 씻고 노트북을 켠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노트북을 그대로 다시 덮어버리고 싶다는 것이다.
사실 걷는 것 자체는 생각보다 쉽다. 첫걸음을 떼기까지 결심이 필요해서 그렇지, 일단 시작하기만 하면 그냥 걸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생각을 정리하고 써내는 건 시작이든 중간이든 끝이든 매번 어렵다. 머리를 많이 쓴다고 해야 할까나. 에너지 소모가 큰 일인 것은 틀림없다. 음... 솔직해지자. 지금 글 쓰기 싫다고 스스로에게 땡강을 피우는 중이다. 아니다 그보다 더 솔직히 그냥 너~무 귀.찮.다. 정신 차리자 인간아.
다시 의지를 끌어 모아다가 기록을 시작해 본다.
일어나기 - 강아지 영양제 주기 - 가글 하기 - 눈곱 떼기(고양이 세수) - 땀복 입기 - 머리카락 고정하기 - 엘리베이터에서 타임스탬프 찍기 - 걷기 - 귀가 - 엘리베이터에서 타임스탬프 찍기 - 씻고 옷 갈아입기 - 약 먹기 - 노트북 켜기 - 기록하기 - 눕기
겨우 넷째 날이지만, 나름대로 루틴이 정해지니 실행 자체가 어렵진 않다. 다만 오늘따라 날이 무척 어두웠고 몸도 유독 무거웠다. 어제는 삭신이 쑤셨는데, 오늘은 쑤시고 뭐고 그냥 겁나 무겁다. 안 하던 운동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어제 늦게 잠 들어서 그런 것 같다. 역시 수면제가 좋긴 좋네. 오늘 저녁에는 꼭 수면제 먹고 일찍 자야지.
일단 캄캄하니까 공원 안으로 들어가기는 좀 무서워서 바깥쪽으로 크게 한 바퀴 돌기로 했다. 근데 뭐가 이렇게 찝찝하지? 그러고 보니 하늘에 구름도 가득한 것 같고 저 멀리 안개도 껴 있는 게 습도가 무지하게 높은 듯하다.
뭐 이런 습기가. 차라리 비가 빡시게 내리는 게 낫지, 이렇게 습기가 많으면 영 찝찝한 게 기분이 별로다. 어제까지는 제법 아침 공기가 서늘하니 걸을 맛이 낫는데, 이제 한여름도 다가오고 진짜 더워지는 게 점점 더 걷기 싫어질 것 같...
뭔가 걷지 못하게 될 만한 핑계를 찾는 느낌이다. 교묘한 나 자슥.
어제오늘 '다글로'를 켜고 중간중간 녹음을 해 보니, 확실히 기록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대로 중얼거린 내용이 담겨 있어서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기억하기에 정말 좋다. 조금 오글거리는 면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기도 하다. 특히 오늘은 나의 변덕스러움을 새삼스레 발견했달까.
오르막길은 진짜 숨이 턱턱 막히네. 아우 숨 차. 저기 올라가면 바로 집 쪽으로 가버려야지. 못 참겠다 증말.
오메 24시간 무인카페... 커피 진짜 땡기네. 아니야, 손에 들고 가는 게 더 귀찮. 빨리 집에나 가자.
- 맞춤법상 커피는 '당긴다'가 맞지만, '땡긴다'고 해야 더 맛이 산다. 가끔 맞춤법이 도리어 말 맛을 다 해치는 것 같다. 쳇. -
사실 그리 가파른 길도 아니었고, 언덕이긴 해도 도로변을 따라 꽤 원만하게 조성된 산책로였다. 기껏해야 10분도 안 걸릴 듯한 거리인데 어찌나 숨이 차던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바로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분명히 그때까지는.
오... 나쁘지 않은디? 좀만 더 걸을까? 그려 그려, 나름 바람도 불고 이제 좀 걷기 괜찮네. 그래, 안 그래도 양심상 계단 한 코스는 넣고 싶었어. 죠~기로 돌아서 거기로 올라가면 되겠다. 오키. Go!
하지만 오르막길이 끝나고 평지에 접어들고 조금 살만해지니까 마음이 금방 바뀌었다. 그것도 아주 기분 좋게. 이렇게 단순할 수가. 마음이란 게 이리 가볍다.
그래도 변덕 덕분에 계단길도 오르고 무사히 30분을 넘긴 후에 귀가할 수 있었다. (적어도 '30분'은 넘겨야 마음이 찝찝하지 않을 것 같다.)
그나저나 출발시간이 점점 더 빨라지는 건 그만큼 빨리 집에 돌아오고 싶기 때문일까. (나가기 전부터 집에 들어올 생각이라니. 집순이 어디 안가네.) 아니면 오늘 몫을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은 걸까.
개버릇 남 못준다고 아무래도 오래된 나의 악습관이 등장하는 것 같다. 아무리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것도 결국엔 해내야만 하는 '일'이 되고 마는 버릇. 즐거움이나 설렘은 퇴색되어 버리고, 마치 빚 독촉이라도 받는 듯 그저 빨리 끝내고만 싶어 진다. 왜 그럴까. 왜 나 스스로에게 이리도 인색하고 잔인하게 구는 걸까.
사실 한동안... 아니 꽤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나의 생각이나 내면을 피해왔다. 최대한 이벤트를 만들지 않고, 최대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최대한 자극을 피해서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번에 새벽 운동과 함께 기록을 시작하면서 '나'와 직면해야 할 필요성을 다시금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그냥 저절로 될리는 없다. 악습이란 게 그리 쉽게 사라지진 않겠지.
그래, 피하지 말자. 부딪혀보자. 너한테 정말 필요한 거잖아. 아니 누가 그게 필요하단 걸 몰라? 내가 그걸 몰라서 여태 피해왔냐고. 그냥 살자, 응? 나는 진짜 싫어. 속 시끄럽단 말이야. 진짜 느무 귀찮아. 여러 가지 내 생각들이 내 안에서 열심히 싸우는 중이다.
글을 쓰다 보니 어느덧 투둑투둑 에어컨 실외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려온다. 비가 오려고 아까 그렇게 후덥지근했나 보다.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는다. 좋다. 빗소리는 좋고 침대도 좋고 강아지도 좋고 내일은 싫다. 내일아 오지 마라. 지구야 멸망해라. 나 운동 못 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