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3일 일요일
아... 졸립다. 오늘은 진짜 좀 졸리다. 이건 나만 이러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생리할 때면 피만 쏟아지는 게 아니라 잠도 쏟아진다. 덕분에?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아침에 늦게 일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20분쯤 알람을 듣고 '아, 좀만 더'하다가 50분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준비를 마치고 개님을 동생방까지 모셔다 드린다. 동생이 방 구조를 바꾸게 되어서 강아지가 무척 당황하기 때문이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계단이라도 헛디딜까 봐 걱정이다. (게다가 내 동생은 나와 달리 아침잠이 많아서 나처럼 벌떡벌떡 일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강아지의 돌발 행동을 빠르게 캐치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사부작거리며 동생방 안으로 들어갔더니 동생도 눈을 떴다. 아침잠도 많은 녀석이 강아지가 걱정되어서 벌떡 일어났나 보다. 개님을 잘 보라고 당부의 말을 전한 뒤 집을 나선다.
어머나 세상에 맙소사
이거 설마 비?!!! 나를 두 번이나 바람 맞힌 비를 드디어 만나는 건가? 이게 웬일?!! 일기예보를 봤는데 비 올 확률이 40%란다. 아니 80%일 때는 안 오던 비가 40%에 오다니. 대체 맞을 때가 없....
어쨌든 오면 되었다! 신나게 우비를 챙겨 나온다. 이슬비라서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이게 무슨 일이야. 비 안 온다고 좀 심하게 투덜투덜한 걸 들으셨나? 하나님이 선물을 주신 걸까? 그만 투덜거리고 돌아오라는 뇌물일까? 당근 먼저 주시는 건가...? 그럼 채찍은 무엇이려나? 벌써 무서운디? (주접을 떤다...)
어쨌든 진~~~~~~짜 좋다, 사람도 별로 없고, 공기도 상쾌하고, 날씨도 시원하니 촉촉하고 걍 다 좋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은 운동기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아니 그냥 안 하면 되지 않냐고? Nope! 이건 내가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것이다. 그게 중요한 포인트다.
완벽한 핑계 및 알리바이?가 생기는 것, 직접 눈으로 확인까지 하려고 일부러 운동기구 코스를 지나친다. 흠뻑 젖어있으니 이건 할 수가 없다. 움하하하하하!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나 스스로 내가 결심한 것인데도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 나는 명분이 필요하다. 이건 무슨 심리일까? 조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마음 편히 운동기구를 패스-할 수 있는 게 되게 기분 좋다. 뭐 어떡해, 좋은 걸.
아... 사람이 별로 없단 말은 취소해야겠다. 초반에는 그렇게 느꼈지만 걷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비 따위야 아무 문제없다는 듯이 다들 우산을 쓰고 걷는다. 내심 놀랐다, 이렇게 비가 와도 걷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이 새벽에 이렇게 비가 올 때 운동을 하는 것은 아마도 내 생애 처음인 듯하다. 그래서 처음 알게 된 사실? 및 경험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비가 와도 걸을 사람은 걷는다. (생각보다 많이)
대부분은 우산을 쓰고 걷는다. 우비는 나 말고 딱 2명 보았다. 그것도 한 분은 자전거를 타고 계셨고, 한 분은 약수터에서 받은 물을 카트에 담아 끌고 가시는 분이었다. 그러니까 우비보다는 우산을 쓰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분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이 시간에 걸으러 나오시는 분들인 것 같다. 나 같으면 '오~ 비? 오~ 눈! 개꿀~ 좋아쒀! 오늘은 안 나가도 되겠다!' 하면서 좋아할 것 같은데....
◽ 비가 내려도 담배 냄새는 잘 퍼진다.
담배 연기가 이렇게까지 멀리 잘 퍼지는 줄 몰랐다. 이 새벽에 이 길바닥에서 대체 어디서 나는 냄새인가 싶었는데, 도로변 안쪽으로 상가 건물 구석 깊은 곳에 한 아저씨가 우산을 쓰고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이렇게 비가 꽤 내리는데도 담배 냄새가 이리 잘 나다니... 심지어 꽤 멀어 보이는데도 말이다. 나는 한편으로 흡연자들이 조금 불쌍하다. 죄다 금연구역이니 어딘가 구석에서 죄지은 사람 마냥 웅크려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흡연부스 같은 공간이라도 어디 많이 만들어 주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라고 담배 연기가 좋은 것은 아니다.
◽ 비가 올 땐 맨질맨질한 바닥을 밟으면 안 된다.
보도블록에는 벽돌이 아니라 약간 대리석 느낌이 나는 맨질맨질한 돌도 있다. 인도의 끝 부분이나 경계선에 주로 그런 돌이 깔려 있는데, 이렇게 비가 올 땐 의식적으로 그 돌을 밟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 잘못 밟았다가는 큰일이 날 수 있다. 어떻게 알았냐고?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몇 차례 미끄러지고 나서도 무심코 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비명횡사할 뻔하였다. (운이 나빴다면 정말 뉴스에 나왔을지도... "경기도 30대 여성, 새벽 운동 중에 변사체로 발견" 껄껄껄, 좀 오바이긴 하지만 진짜 위험하긴 했다.)
◽ 우비는 모자 부분에 '챙'이 달린 게 좋다.
내가 입은 판초형 우비에는 '챙'이 없었다. 바람에 날려 벗겨지지 않게 동여맬 수 있는 끈은 있었지만, 빗방울이 눈에 직빵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챙'이 필요하다. 그나마 이슬비였기에 망정이지 장대비였으면 도저히 걷기가 힘들었을 것 같다. 이슬비는 약간 미스트 뿌리는 것 같기도 해서 처음엔 그리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빗물과 땀이 뒤섞인 채로 얼굴에 마구 흘러서 손으로 연신 닦아내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엔 챙이 달린 우비를 사야겠.... (너 이거 또 하려고? 아니~ 그냥 생각만 해본겨~ 에이~ 못혀~ 안혀~)
아 기다리고 아 기다리던 비가 와서 정말 시원했다. 어젯밤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가면서 제법 시원한 빗소리가 들리길래, '그래 이 정도로 만족하자~' 싶었는데... 오늘 아침까지 비가 오다니 너무너무 행복했다. 비 오는 날 우비를 입고 걸어보는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되게 특별한 느낌이었달까? 참 우습다. 비가 뭐라고 나를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할까?
집에 돌아와 씻고 노트북을 열고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점차 빗소리가 잦아들더니 이젠 비가 아예 그쳤다. 바라던 대로 내가 걸을 때 딱 비가 내렸고, 내가 들어오니 딱 그친 것이다. 왜 내 판초형 우비를 마중 나오지 않냐며 징징대고 투덜투덜 댄 게 떠오른다. 정말로 오늘 내린 비가 하나님의 선물처럼 느껴져서 조금은 찡하기도 하고 또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