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木
그가 계획한 대로, 하지만 정작 실천은 내가 하고 그이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이, 어설프나마 가계부를 적기 시작하며 놀랍게도 정신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얻어내고 있다. 경제적 도움은 아직 그리 효과를 보지 못할지라도, 매일 내가 쓰고 있는 것들의 값어치를 새겨두는 건, 의외로 감사할 것들이 늘어간다는 의미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무엇보다 이 추운 겨울에 뱃속에 나날이 커가는 아이를 품에 보듬듯 안고 있자니, 새삼스레 내 행운이 전신에 깊이 스미듯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낀다. 충분한 돈이 있고, 따뜻한 집이 있고, 예쁜 옷들이 있고, 향기로운 크림이 있고, 원하는 것들을 먹을 수 있고, 나를 사랑해 주며 나를 안아주는 이, 나를 보호해주는 이가 곁에 있다는 것. 겹겹의 안전한 막에 둘러싸인 나는 더할나위 없이 만족한다. 이런 날들을, 내 시공간을 누가 시샘하고 저주할까 쉬쉬하고 티내지 않으며. 세상 불행한 이들의 부정이 튈 새라 꼭꼭 숨은 채로.
아이의 얼굴을 볼 날이 이제 백일 남짓으로 다가왔다. 길다면 길수도 있었지만, 다시 행복을 찾고 보면 순식간에 지나간 듯도 싶은 임신 기간. 내 몸이 온전히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힘들고 지칠 때도 있지만, 아이와 완벽히 함께인 나날들이 곧 사라질 거란 건 아주 조금은 아쉬운 일일지도. 어느새 적응해버린, 그러면서도 매순간 우습고 신기하고 사랑스러운 뱃속의 아이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나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