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조약돌 둘 18화

우리라는 다면체 보석

화 火

by 하이디 준

하와이 여행을 앞두고 있다. 집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지내는 나와 달리, 쉴 틈 없이 사람에 치이는 그는 그저 주말과 휴가만 바라보며 퉁퉁 부어간다. 딱하고 미안스러워서 다른 건 신경쓰이지 않도록 주의하는 편이지만, 역시 본성이 게으르고 이기적인지라 간혹 그의 노고를 잊고 만다. 휴가 준비를 왜 혼자 해야하느냐며 불평을 토하는 그에게 뜨끔했지만, 한편으론 그 모든 시간과 계획들이 나보단 그에게 더 중요한 것들이어서 내가 정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속으로나마 작게 변명해본다. 그럼에도 모든 즐거움을 같이 누리는 것도 나라서, 역시 나란 녀석은 무지막지하게 치사한 모양이라고 씁쓸하게 되새긴다. 런던, 도쿄, 뉴질랜드… 연애하던 학생의 신분으론 누리지 못했던 호사를 다 채우려는 듯 그는 지치지 않고 나를 데리고 다닌다.


그가 들으면 또 서운할 일인지, 전혀 반대로 뿌듯해 할 일인지는 모르지만, 실은 그가 나를 위해 해주는 것들, 나와 함께 해주는 것들에 대해선 충분히 감사하지 못하고, 무언가 곤란한 일이 터졌을 때, 삶이 다시 흔들릴 것만 같은 때에 그가 곁에 있어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때에만 그를 다시금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가 내게 일어난 일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그저 나를 사랑해주기만 하는 것이 새삼 놀라워질때면, 아, 다행이구나, 나는 모든 게 실은 잘 되어가고 있는 거야 라고 믿을 수 있게 된다.


해묵은 핏줄의 소란이 다시 내 일상을 비집고 들어오려 하기에, 지난 일기-월기-연기를 죄다 훑었다. 나약한 나는 찔릴 때마다 세상이 끝날 것처럼 절망했지만, 동시에 우습도록 다시 순진하고 말초적인 어린 애의 욕구와 환상만으로 돌아오곤 했다. 모두, 곁에 있어주었던 이들 덕분이었다. 늘 혼자라며 칭얼댔지만, 바로 그 다음 페이지에선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사랑받고 있었다. 아픈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나라서, 상처 준 이들은 깡그리 잊어가는 통에, 나를 아껴줬던 이들의 기억까지 날아가버린다. 나이를 먹어가며 점차 자주 하게 되는 생각이지만, 나는 역시 다른 이들의 은혜에 기대어서, 그렇게 멋대로 잘난 척하며 계속 살아올 수 있었던 거다.


굳이 오늘의 기록을 남기자고 결정한 것도, 그저 고통만 가득한 것처럼 얘기하는 어린 ‘나’들의 기록 속에서, 도리어 제법 잘 살았다는 감회가 흘러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더 애틋해지는 그에 대한 감정도 기록의 쓸모를 증명했고. 더불어 우스꽝스러운 꼬마, 11-12살이라기엔 턱없이 부족해보이는 여자아이의 글솜씨를 보면서, 아아, 이런 아이를 키우는 건 의외로 재미날지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어리석고 엉뚱하지만 아직은 그게 용서되는 나이라서 그저 우습기만 한.


엄마도 그랬을까. 나를 그저 속썩이는 존재만이 아니라, 꽤나 웃기는, 재미난 존재로 봐주었을까. 엄마에 대한 모순된 감정들이 모두 혼재하는 기록들 속에서, 현재의 나는 현재의 엄마를 사랑할 이유와 힘을 얻는다. 심지어 상처 준 이들을 딱하게 여길 마음의 여유도 찾는다.


누구도 언제나 착하지만 않고, 언제나 끔찍하지만 않고, 언제나 현명하지만도 않다.


다정하고 상냥할 때가 있는가 하면, 지독하게 잔인할 때도 있는 것뿐이다. 사람마다 그 비율이 좀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의 악행이 그 누군가의 선행을 상쇄시키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좋은 건 좋았던 대로, 나쁜 건 나빴던 그대로. 나는 그렇게 타인을, 나 자신만이 아닌 타인을 입체적인 존재로 받아들이는데 겨우, 아주 간신히 성공한거다.


이게 전부, 그가 나를 사랑해주어서, 나도 내 못난 부분까지 나라는 걸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온 부산물인 것을, 결국 전부 그 덕분인 것을, 그는 알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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