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水
내가 왜 이렇게 지쳤나 생각해보았다. 아니, 생각할 정신도 없었고, 그냥 문득 떠올랐다.
이 가족. 이 굴레.
혼자 있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잠을 자는 것만으론 충분한 도피가 되지 않는다. 숨을 쉬고, 귀가 아프지 않을 공간으로 가야한다. 토할 것 같다. 정신이 아니라 몸이. 한없이 피곤하고, 그래서 도망치고만 싶지만, 정신은 그래선 안된다고 말한다. 보통은 몸이랑 동의해줬을텐데 말이지.
어쩌면 이것만 끝내면, 이것만 넘기면 도망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별로 슬프다고 생각지 않는다. 예전처럼 고통스럽게 인식하지도 않는다. 처절하지도 않다.
다만 문득 머리에 울음이, 눈물이 차 있다는 느낌을 받을 뿐. 무언가 목을 짓누르고 올라온다는 느낌이 가끔 있을 뿐. 날카롭고 또렷하게 인식하지는 못한다. 모든 게 무뎌졌다. 아주 너절하게 닳았다. 아주 뻣뻣하게 굳었다. 종종 숨을 너무 얕게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잊어버리면 멈출 수도 있을만큼.
‘아름다운 것들이 죽어간다’고 말해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이미 마비되었다. 삶에 대한 내 감각은.
늘 너무 선명해서 끔찍하기도 찬란하기도 했던 내 감각은, 이제 죽은 것 같다. 적당히 병들었던가.
빨강. 빨강. 빨강.
죽어가는 이들은 붉은 꿈을 꾸지.
따뜻하고 비릿한 피의 색을.
나는 빨강을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