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 일상에 초록이 들어왔다
무색무취
글쓰기 주제를 선정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매일을 쳇바퀴 돌듯이 사는 직장인이라 하루하루가 거의 비슷비슷해서 특별한 글감이 없다. 워낙 평탄하고 무난하게만 살아와서 그런지 남들마다 하나둘씩 있는 스펙타클한 에피소드도 딱히 없고 남들이 살면서 한 번씩 만났다는 역대급 또라이나 진상도 만난 적이 없다. 그냥 소문으로만 듣고 세상에 그런 사람도 있구나~ 했을 뿐.
이런 무색무취의 인생이 때로는 꽤나 큰 콤플렉스로 다가온다. 여럿이 모인 술자리나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모임에서 자신있게 꺼내들 만한 에피소드가 없다는 건 생각보다 더 초라한 일이다. 특히 남의 관심을 은근히 즐기고 주목받고 싶어하는 은은한 관종인 나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술자리 에피소드 하나 얻자고 진상이나 또라이를 찾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냥 무색무취인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살아가려 한다.
식물(에세이)의 마력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나는 일요일 오후만 되면 슬금슬금 불안해지는 인간이라 그 시간대만 되면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고 집안이나 동네를 어슬렁거리면서 불안해하는 게 일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스멀스멀 엄습하는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집을 나섰다. 마침 커피를 안 마신 상태라 집앞의 카페에 가서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킨 뒤 커피를 가지고 옆 아파트단지에 있는 파라솔 아래로 향했다. (우리 아파트가 아니라 옆 아파트로 가는 이유는 그곳 분위기가 더 고즈넉하고 조경도 잘 되어있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밀리의 서재에서 읽을 책을 골랐는데, 마침 신간에 <내 기분이 초록이 될 때까지>라는 책이 있었다. 평소에 경제 서적을 많이 읽지만 그날은 복잡한 경제 이야기보다는 긴장된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에세이가 읽고 싶었다. 나는 홀리듯 책을 다운받았고 의자에 웅크려앉은 채 전자책을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앞에 몇 장만 가볍게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쉽고 재미있어서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광고 아님) 책을 읽는 동안 내 주위로 간간이 산책하는 동네 주민들이 지나다녔고 적당히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읽자 주변의 풀과 꽃,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새삼 달라 보였다.
그렇게 7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는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식물책을 간간이 읽고 있다. 식물책은 표지도 초록색이고 종이도 초록색이고 글자도 초록색 같다. 보기만 해도 눈이 편해지고 마음이 가라앉는다. 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다가 식물책을 펴면 마치 사방이 푸른 정원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든다. 앞으로도 식물책을 자주 읽게 될 것 같다. 어쩌면 반려 식물을 키우게 될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