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ㅎㅈ Feb 28. 2023

당신의 옷장은 유통기한이 얼만가요?

나를 조금 바꾼 J의 옷장

2015년 봄. 처음 J를 만났던 날. 첫 만남에 J를 보며 그가 옷을 잘 입는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그 당시 내게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은 한참 꾸미기 좋아하던 또래 대다수가 즐겨 입는 스타일로 입는다는 거였는데, 조금 거칠게 말하면 홍대 술집 골목이나 클럽 거리에 한껏 멋을 부린 20대 초반 깔롱쟁이 남자애들 있잖아. 뭐 그런 거였다.


J의 옷차림은 그들과 달랐다. 깔끔하지만 무난한 티셔츠에 무난한 바지, 무난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약간은 신경 쓴 느낌이 들긴 했지만 분명 유행 따라 멋을 부린 느낌은 아니었다. 오해를 할까봐 덧붙이자면, 나는 평소 사람이나 친구를 보며 옷차림을 평가하는 사람이 절대 아님을 밝혀둔다. 오해하지 말라. 다만 그 자리는 내게 번호와 함께 데이트를 의뢰한 J와의 첫 만남이었기에 누구나 그렇듯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외형을 한 눈에 볼 뿐이었다.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요?


아무튼. 그 즈음 썸을 타거나 잠깐씩 연락하던 대부분의 남자애들은 앞서 말한 깔롱쟁이들이었다. 그 이유는 내가 연애 대상을 볼 때 무엇보다도 옷차림을 눈 여겨 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다보니 더더욱 J의 옷차림은 무난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갸웃하던 첫 만남.


연락이 조금 길어지면서 J에 대해 의외로 알게 된 점하나는 바로 그가 패션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오래 전부터 좋아했던 브랜드들을 가끔 얘기했는데 나로선 도통 처음 들어본 이름들이었다. 그는 자신만의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었고 자신만의 패션이 있었다. 나도 패션에 꽤나 관심이 있다 생각해온 입장이라 그가 오타쿠*인가..? 생각했다.

(*조롱이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라. 난 오타쿠가 세상을 바꾼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수줍어 하는 얌전한 외형과 달리 자기 세계와 가치관, 취미가 뚜렷한 그의 의외의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반한 내가 연애를 시작하자고 먼저 제안했고 그렇게 우리 연애는 시작됐다.


연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가방과 비슷한 걸 사주고 싶었다며 가방 하나를 선물했다. 그의 가방 브랜드를 당시엔 대충 아는 척 했지만 사실 몰랐다. 지금이야 그 브랜드는 국내에서 나름 유명하지만 당시의 나는 듣도 보도 못한 브랜드였다. J는 어떤 바지 브랜드도 좋아했다. 그외에도 당시엔 지금만큼 핫하지 않았던 여러 브랜드를 좋아했다. 그런 브랜드들의 공통점은 짧지 않은 업력이다. 그의 패션 세계에서 대강 아는 척, 가끔 모르는 걸 실토하고 집에 와 검색해보면 스물 다섯의 나이에선 대부분 꽤나 값이 나가는 제품들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어릴 때부터 갖고 싶은, 잘 아는 브랜드들이 꽤 있었고 (자기 기준) 허튼 옷에 돈을 쓸 바에야 돈을 차곡차곡 모아 오래 걸리더라도 원하는 것 하나를 샀다. 도저히 자기 돈을 모아도 안 되겠다 싶으면, 또는 단종돼 더이상 구할 수 없는 물건이면 빈티지를 이용하곤 했다. 기능성 스포츠 의류를 제외하면 그다지 브랜드를 따지지 않고 유행에 충실하지만 저렴한 옷가지들을 사모으던 내게 그의 소비 방식은 꽤나 독특하게 다가왔다.


J는 일반적인 인터넷 쇼핑몰에서 유행하거나 저렴한 옷들을 사는 법이 없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브랜드 충성도가 있는 만큼 J의 옷 스타일도 꽤 일관적이었는데 그 시절부터 주구장창 조거 팬츠를 입고 다녔다. 물론 그 조거팬츠는 지금도 몸에 붙은 것처럼 입고 다닌다. 연애를 하는 사이니 자연스레 J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사랑을 하면 그조차도 멋있고 귀엽게 느껴진다. 많은 의미 부여를 하고 장점을 발견해낸다. 2018년 즈음 내가 환경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J의 소비를 진정한 친환경이라 속으로 추켜 세웠다.


대학생 시절부터 내가 몇 켤레의 구두를 사고 버렸는지 세기도 어렵다. 어떤 플랫, 어떤 로퍼, 어떤 힐, 어떤 워커, 어떤 부츠. 어떤 건 앞코의 인조 가죽이 벗겨져셔, 어떤 건 밑창이 갑자기 걷다가 뚝 하고 떨어져서, 어떤 건 안쪽 발 대는 부분이 어그러져서, 또 어떤 건 뜯겨서, 어떤 건 발이 너무 아파서. 수많은 사유들로 수많은 구두와 이별했다. 지금에야 신중하게 브랜드와 소재와 형태를 고르고 골라 몇 년 째 신고 있지만 신발은 결국 닳기 마련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 J가 구두 수선 업체에 들렀다고 했다. 2015년 이야기를 하다 왜 며칠 전이냐 물으신다면 패션 철학이 한결 같은 J는 연애 관계에서도 한결 같았고 그래서 그런지 J와 지금도 연애 중이다. 아무튼 그런 J에겐 아주 값비싼 구두가 두어 켤레 있는데, 직장 내규상 구두를 5년 가까이 매일매일 신다보니 밑창이 많이 닳아 밑창 가는 작업을 하러 왔단다. 그것도 일반적인 수선점이 아니라 값비싼 구두만 전문으로 하는 장인 업체를 고르고 골라서. 밑창이 닳거나 굽이 빠지면 큰 고민 없이 당연히 신발들을 버려 왔던 내게 간만의 놀라움이었다. 그는 그 신발을 앞으로 10년도 더 신을 작정이란다. 관리만 잘 해준다면 누군가에게 물려줘도 될 정도로 보인다.


물론 정답이 없는 것도 같다. J의 소비나 나의 소비 중 하나가 어떤 정답 하나를 가르키고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몇 년에 걸친 나의 소비 경험은 대체로 불유쾌한 감정을 안겼는데 과거에 이사를 하다가 몇 십 벌의 옷을 갖다 버리면서 쓴 글​도 비슷한 맥락이다. 다만 정말로 필요해서 사는 게 아닌 욕망을 욕망하면서 재화를 사모으는 시대에 진절머리가 나 좀더 새로운 소비를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일관된 적은 빈도의 소비 패턴, 일관된 믿을 수 있는 브랜드, 일관된 자신만의 스타일. 쓸모 없이 만들어지고 쓸모 없이 소비되고 쓸모 없이 버려지는 것들이 많은 시대.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생기는 파괴와 비용은 고작 이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게 내가 나의 소비를 계속해서 고민하고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다.



작가의 이전글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