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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Mar 11. 2023

엑스레이 골반 뼈 안에 있던 그것.

숨겨져 있던 그것!!!

발단은 지난주 금요일 발레 수업이었다. 바에서 다리를 들어 올려 찢는 동작을 하는데, 허벅지 안쪽 근육에서 토독하고 소리가 났다. 예전에 폴 타다 다친 근육이 또 찢어진 것 같았다. 한참 운동에 푹 빠져 있어 불안한 마음에 다음날 눈 뜨자마자 회사 근처 정형외과로 달려갔다. 혹시나 못 나을까봐, 이렇게 평생 운동을 못하게 될까봐 마치 선수 생활이 끝난 사람마냥 의사 선생님 앞에서 온갖 호들갑이란 호들갑을 다 떨었다. 별로 다친 거 아니고 젊으니까 금방 나을 거라고 단호박처럼 말하던 의사 선생님은 이내 모니터에 내 엑스레이 사진을 띄웠다.  


-척추 뭐 나쁘지 않고요. 골반 뼈 양쪽 높이가 뭐 한 1~2mm 정도 차이가 나는데 이 정돈 뭐 괜찮습니다. 그리고 허벅지 쪽 뼈도 뭐 전혀 문제 없고요.


그래도 꾸준히 운동한 보람이 있네 하며 척추부터 골반, 허벅지 뼈까지 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라 열심히 엑스레이를 눈으로 좇았다. 바로 그때. 엑스레이의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부부부분을 짚어가며 말하던 선생님의 말에 잠깐 찰나의 마가 뜬다.


뭐지?


선생님 말씀에 따라 열심히 엑스레이를 따라 가던 내 눈에도 마가 뜬다. 골반과 고관절 그 사이에서.


둥글고 커다란 양쪽의 골반이 감싸고 있는 그 곳. 커다란 골반에 다리 뼈의 고관절이 탁 맞물리듯 끼워져 있는 그 옆. 뻥 하고 까맣게 뚫려 있어야 할 그 곳.

그 곳에 무엇인가.. 있었다..!!





그건 바로 생리컵이었다. 눈이 잠깐 커졌다 갑자기 머쓱해졌다. 아 맞다 나 생리 중이지 참. 다행히 임신 엔딩도 질병 엔딩도 아니다.

 

'근데.. 선생님은.. 생리컵이란 존재를.. 알까..?'


갑자기 내 머릿속엔 '별 걸 다 넣는다'던 유튜브 영상 썸네일이 스쳐갔다. 사람들이 항문과 성기에 별 걸 다 넣다 실려 온다던 각 분야 의사들의 인터뷰가 떠올라 순간 조급해졌다. 급하게 그런 거 아니라고 오해라고 덧붙일까 하다 그냥 말을 삼켰다. 여전히 뒷통수가 머쓱했지만 전혀 아무렇지 않은 척 엑스레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엑스레이를 계속 보는 내내 나의 깜찍한 생리컵은 살짝 기울어진 채 질 안에서 경부를 잘 받치며 안착해 있었다.


생리컵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지도 벌써 7년이 흘렀다. 이제는 첫 날 정도가 아니면 생리를 하는 걸 종종 까먹는다. 까먹지 않고 갈아주기 위해 의식적으로 기억할 정도다. 진료를 보고 나오는 길에 문득 몇 년 전에 첫 생리컵을 썼던 시절 브런치에 남긴 글이 생각났다. 오랜만에 글을 열어보니 7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진 않은지 그때와 지금은 또 꽤 많은 게 달라져 있다. 그래서 7년간의 생리컵 사용자의 경험을 쓰고 싶어졌다.


생리컵을 쓰게 되면서 가장 편리해진 건 아무래도 생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생리의 각종 현상들과 멀어졌다는 점이다. 생리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 서 있다 자리에 앉을 때마다 느껴지는 그 축축함,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닦을 때마다 묻어나던 피, 혹시나 샜을까봐서 손으로 옷을 더듬던 것, 짧은 간격으로 뒷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교복 치마를 확인하던 것, 엉겨 붙던 피. 특히나 생리가 일종의 부끄러운 것으로 강하게 인식 되던 시절엔 이 모든 게 괴로움이었고 부끄러움이었고 불편함이었다. 이중 대부분은 탐폰을 쓰면서 해소가 됐지만 탐폰 역시 가끔 실 끝을 따라 조금씩 새던 피를 어쩌지 못했고, 생리대 못지 않게 몇 시간 간격으로 자주 갈아줘야 하는 화학 제품인 탓에 신경을 꽤 써야 했다.


생리컵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이었다. 속옷과 살에 전혀 묻지 않는 것. 어떠한 샘도 어떠한 냄새도 만들지 않는 것.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 그 어떤 것도 확인되지 않는 것. 예전만큼 자주 화장실을 가지 않아도 되는 것.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오랜 시간 보내야 해도 끄떡 없는 것. 그 어떠한 야외 활동, 그 어떠한 운동, 그 어떠한 여행, 그 어떠한 물의 공간에서도 문제 없는 것. 단순히 생리를 잊는 것 이상으로 생리컵은 내 행동에 더 많은 자유를 가져다 줬다. 한 달에 한 번, 1년에 열 두어 번. 그 시간마다 누구보다 억울해 하는 나에게 생리는 예전만큼의 제약을 주지 않는다.


브런치에 첫 생리컵 글을 썼을 때만 해도 생리컵을 어떻게 잘 접어 넣을 것인가 몰두했다. 지금에 와서 다시 읽으니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접기 방식 이름이 '라비아 접기'인 걸 알았다.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첫 사용에다 접기며 넣기며 끙끙 거리다 겨우 넣고 나서도 조금씩 새는 통에 절망하곤 했는데, 지금은 마치 탐폰을 갈듯 생리컵을 갈아 낸다. 손쉽게 빼고 손쉽게 접어 손쉽게 한 번에 넣으면 생리컵은 손쉽게 펼쳐진다. 이게 7년의 힘인가보다.


7년 쯤 쓴 지금의 생리컵 패턴은 이렇다. 양이 많은 첫 날이 주말일 때는 생리컵을 계속 쓴다. 만약 출근해야 할 평일이면 탐폰을 쓴다. 이젠 회사나 바깥 화장실에서 생리컵을 가는 것도 어렵지 않지만, 그래도 첫 날엔 양이 많아 혹시나 생길 수 있는 불상사를 막고자 탐폰을 쓴다. 두 번째 날부턴 생리컵을 쓴다. 회사에서도 손쉽게 간다. 생리대 교체 때문에 화장실에 가는 빈도가 훨씬 줄었다.


탐폰을 사는 주기는 확연히 길어졌다. 1년에 한 두 번. 한 번 넉넉히 사두면 탐폰 한 통으로도 한참을 쓴다. 생리에 돈이 덜 들어간다. 자연히 탐폰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버릴 일도 줄었다. 쓰레기 자체가 줄었다. 생리가 거의 줄어들 즈음에도 불편하게, 아깝게 탐폰이나 생리대를 쓸 일이 없어졌다. 탐폰을 쓸 때 종종 느끼던 질 건조도 사라졌다. 자다 깨(야만 하)거나 자고 일어나서 경악하는 일도 없어졌다. 생리 4, 5일 차 즈음엔 나 지금 생리컵 쓰고 있으니 이쯤에는 갈아줘야 한다고 기억해야 할 정도다.


여행지나 여행 길이, 여행 종류에 따라 생리 주기가 겹치면 곤란할 일이 생리컵을 쓰고선 사라졌다. 갑작스런 생리에 낯선 곳의 낯선 생리대를 고를 필요가 없어졌다. 미리 배낭에 부피가 큰 생리대를 여러 개 쟁일 필요도 없어졌다. 생리컵 하나만 챙기면 언제 어디서든 물에 들어가고 마음껏 바깥을 누릴 수 있다. 갑자기 속옷에 새 어쩔 줄 몰라 하던 일도 겪지 않는다.


7년이란 시간 동안 생리컵도 발전했다. 초기 생리컵은 접어 넣으면 안에서 펼쳐지면서 경부 아래에 실링(진공)으로 밀착하여 피를 받쳐 내는 방식인데, 요즘 나오는 생리컵은 실링 없이 말 그대로 그냥 피를 받아내는 디스크 형식도 있다. 아무래도 경부 아래를 인위적으로 실링하는 게 부담이 될 수 있어 새롭게 개발된 생리컵이다. 이런 형태를 생리컵 대신 ‘생리 디스크’라 부른다.

생리 디스크 (출처 hello period)

국내에는 아직 한 브랜드 제품만 있지만 해외에는 여러 브랜드의 디스크가 있다. 사람에 따라 생리 당시 복부 팽창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내부 진공까지 이뤄지면 압박을 느낄 수 있어 디스크가 더 부담 없단다. 또 질 입구에서 경부까지의 길이 등 자신의 몸에 따라 사이즈를 다르게 골라야 하는 생리컵과 달리 디스크는 보통 원 사이즈로 누구나 사이즈 고민 없이 쓸 수 있다. 더 편하다는 건 다 해보고 싶어 얼마 전 나도 디스크를 구입했다.


인류가 존재하던 그 순간부터 있었을 생리는 그 어떠한 문명과 문화보다 오래된 현상이고 몸이자 역사 그 자체인데 그렇게 유구한 세월을 겪고서도 아직도 생리를 완전히 컨트롤 하기 쉽지 않고 용품의 안전성은 여전히 문제가 되고 생리통 관련 의학은 발전이 요원해 보이는데 심지어는 여전히 터부시 되기도 한다. 도대체 생리가 뭐길래.

월경 수치심에 맞서 싸우는 케냐 국회의원 (출처 국민일보)

물론 생리컵이 답인 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겐 생리대가, 탐폰이 잘 맞다. 여러 번에 걸쳐 생리컵 글을 쓸 때마다 혹시나 생리컵에 대한 예찬이 생리를 더 숨기자는 의도로 읽히면 어쩌나 고민하기도 했다. 더욱 숨겨야 할 것, 더욱 감춰야 할 것으로. 물론 당연히 아니다!


그렇지만 생리 용품의 발전이 이제까지 이렇게나 더뎠다는 게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그게 결국은 생리에 대한 인식과도 얽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에라도 여러 형태의 생리 용품이 개발되고 있어 다행이다. 더이상 터부시 되지 않는 것과 더불어 생리하는 사람도 더 편해져야겠지. 도대체 생리가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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