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호~!
길었다. 지난해 여름쯤 먹기 시작한 불안장애 약을 이번 처방을 끝으로 종료한다. 더 이상 약을 먹지 않아도 되겠다는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며 살짝 울컥했다. 상담을 겸하는 건 아니라 짧은 진료 시간 그렇게 이야기를 속속들이 나눈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오랜 시간 정기적으로 만나기도 했고 늘 감사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지, 마지막 진료라는 생각에 머리를 구십 도로 숙여 인사드렸다. 정말 덕분이에요.
내가 불안장애와 공황장애를 얻을 거라곤 평생 생각해 본 적 없다. 편견이긴 했지만, 나는 기질적으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 생각했고 그래서 나와는 다른 세계라 여겼더랬지. 만 뭐 별 수 있나. 나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흔히 마음에도 근육이 있어 자꾸 단련시켜야 한다고 하는데, 같은 원리도 불안도 그랬다. 자꾸만 불안에게 자리를 주고 불안이 운동할 기회를 주면 결국 불안도 근육을 키워낸다. 불안의 일상화다.
스트레스도 꽤 잘 컨트롤하고 회복탄력성도 나쁘지 않았던 내가 전세 사고를 겪으면서 본의 아니게 불안을 거의 고강도로 운동시켜 버렸고 그 결과 어느 순간부터 불안은 내 머리와 한 몸 근육이 됐다. 병원을 가게 된 이유였던, ktx에서 처음 느낀 증상은 당연히 병원에 가야 될 공황장애 증상이었지만, 그 외에도 불안을 일상적으로 느끼게 됐다. 이를테면 운전을 하면서도 사고에 대한 불안을 필요 이상으로 느꼈고 고속도로를 탈 때마다 다른 차에 받혀 차가 뒤집어지는 상상이 매일 머릿속에서 벌어졌다. 운전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사고와 재해에 대한 쓸데없는 두려움이 커졌다. 불안은 불안을 불러온다고 했나.
작년 여름 스페인으로 향하던 비행기가 도중 심한 터뷸런스를 겪으며 기체가 꽤 오랜 시간 동안 덜컹거렸다. 물론 객관적으로도, 꽤 비행기를 많이 타본 편이지만 처음으로 겪는 심한 흔들림이기도 했으나(지금 생각해도 무섭긴 해..), 나는 정말로 그때 죽는 줄 알았다. 유언을 남길 여건도 안 됨에 슬퍼하며 그래도 애인과 함께 죽음을 맞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까지 생각하며 진짜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더랬다. 그러면서도 공황장애가 오지 않게 불안을 컨트롤하느라 정말 힘이 들었다. 공황장애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더 불안해지기 때문에 이 생각 자체를 참느라 혼이 났다.
자 어쨌든. 이건 다 과거고요. 불안장애 약을 끊었다는 것은 이 모든 걸 드디어 (거의) 이겨냈다는 뜻이다. 우하하. 우선은 내 불안을 받아들이는 게 가능해졌다. 도로를 탈 때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 얼른 지워버린다. 내가 불안을 느끼는 건 어쩌면 인간의 생존 본능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다만 심해지지 않게 길게 생각 말고 얼른 떨쳐내 보자. 이제 할 수 있으니까. 어쩌면 이 8개월로 값진 경험을 했다. 사람이면 불안을 느낄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컨트롤하는 방법을 배웠으니까. 그래서 드디어 약을 끊는다!